2009년 8월 29일 토요일

2008.03.21. 라우타바라 북극의 노래 / 스트라빈스키 피아노 협주곡 / 카프리치오 / 시벨리우스 교향곡 7번 - 알렉산더 토라제 / 미코 프랑크 / 서울시향

2008년 3월 21일(금)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미코 프랑크
협연자 : 알렉산더 토라제

Rautavaara, Cantus Arcticus
Stravinsky, Concerto for Piano & Wind Instruments
Stravinsky, Capriccio for Piano & Orchestra
Sibelius, Symphony No. 7 in C, Op 105



러시아 교회 종은 유럽 교회 종과는 달리 흔들어 소리 내지 않고 두드려 소리 낸다. 종지기는 온몸으로 도구를 조작하여 종 여러 개를 동시에 두드릴 수 있으며, 이때 음색도 음높이도 다른 종들이 어울려 신비로운 폴리리듬을 이룬다. 이러한 종소리와 두드림의 미학은 스트라빈스키 음악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이를 두고 역동적인 고요함(calme dynamique)이라 했고, 음악학자 크리스티안 카덴은 진동하는 고요함(schwingende Ruhe)이라 고쳐 말했다.

이는 박절과 마디 구분을 무시하며 끊임없이 바뀌는 리듬, 어택(attack)을 강조한 음형과 느닷없는 악센트, 이 악기 저 악기 두서없이 치고 나오는 듯한 관현악법 등으로 나타나며, 더 나아가서는 음악 형식과 미학이 가지는 순환적, 대칭적 속성, 다시 말해 스트라빈스키 음악에서 자주 나타나는 아치(arch) 형식이나 발전과 진화보다는 순환과 갱생을 추구했던 미학관 또한 '진동하는 고요함'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리듬과 음형과 관현악법 등이 종소리를 닮았다면, 형식과 미학은 종이 흔들리는 모양을 닮았다.

<피아노와 목관 악기를 위한 협주곡>과 <카프리치오>를 협연한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토라제는 러시아 사람답게 스트라빈스키 음악에 숨어있는 '종소리'를 본능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피아노 건반을 쿵쿵 신나게 두드려대며 음악의 '진동'을 제대로 이끌어냈으며, 때때로 그것이 지나쳐 선율 윤곽을 망가트려 옥에 티가 되기도 했다. 페달을 밟을 때도 만만치 않게 힘차서 온몸으로 소리 내는 종지기 이미지가 스머프 같은 외모와 겹쳐 희극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때로는 몹시 여린 소리로 '고요함'을 '진동' 못지않게 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시향은 '러시아 종'을 치는데 그다지 익숙지 못한 듯했다. 리듬이 깔끔하지 못할 때가 잦았고, 악센트는 충분히 살리지 못했으며, 어택(attack)을 살려야 할 곳에서 부드럽게 연주할 때가 잦았다. 국내 악단이 으레 그렇듯 금관이 취약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지휘자가 잘만 이끌었다면 이날 연주보다는 훨씬 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코 프랑크는 뛰어난 지휘자이지만 나이가 어린 만큼 경험이 모자랐던 것인지 스트라빈스키는 그다지 시원찮았다.

핀란드 출신 지휘자가 제 실력을 발휘한 것은 역시 핀란드 작곡가들의 작품에서였다. 라우타바라의 <북극의 노래>는 무엇보다 핀란드 늪지대에서 채록했다는 새 소리가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지는 것이 재미있다. 관악기가 흉내 내는 새 소리, 지저분하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만 그래서 더 정겨울 것 같은 진짜 새 소리, 그리고 다큐멘터리 배경음악처럼 차분히 깔리는 음악이 서로 다른 시간과 역할에 따라 흘러가는 것은 아이브스의 <대답 없는 질문>을 연상시킨다. 관악기 여러 대가 어지럽게 얽히며 새 소리를 흉내 내는 곳에서 지휘자가 비팅을 하지 않고 악기마다 일일이 예비박을 주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지휘자가 솜씨를 가장 잘 뽐낸 것은 핀란드를 대표하는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7번에서였다. 몇몇 거장 지휘자들이 브람스 풍으로 묵직한 해석을 보여준 것과는 달리 미코 프랑크는 북유럽의 서늘한 공기가 피부로 느껴질 듯한 분위기를 제대로 살린 점이 마음에 들었다. 군데군데 템포가 너무 빠른 듯싶어서 갸우뚱하기도 했지만, 이 또한 젊은 지휘자의 패기로 좋게 볼 수도 있겠다 싶었으며, 오히려 이것으로 지휘자가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브람스'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는 듯싶기도 했다.

이 곡은 1924년에 작곡, 초연되었다. 이미 1908년에 쇤베르크가 현악 사중주 2번을 내놓으면서 무조음악 시대를 활짝 열어젖혔음을 생각해보면, 화성과 조성의 해체라는 새 흐름을 따르지 않고 전통적인 기능 화성 작법을 고집한 시벨리우스는 브람스의 망령에 사로잡힌 퇴행적 작곡가라 비난받을 만도 하다. 그러나 독일 중심 음악사에서 뽑아낸 틀을 유럽 역사의 변두리에 머물렀던 나라 작곡가에게 그대로 뒤집어씌우는 것이 옳은가. 시벨리우스에게 브람스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는 것이 과연 옳은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독일 음악 논리로 따지는 조성과 화성으로 된 '뼈대'가 아니라 그 겉을 둘러싼 피와 살, 그 주변의 서늘하면서도 싱그러운 공기와 그 공기를 타고 너울너울 날아오르는 눈송이야말로 시벨리우스 음악의 참모습이 아닐까. 지휘자 미코 프랑크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날 서울시향이 가장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던 곳은 빠르기말이 프레스토(매우 빠르게)로 바뀌는 마디 449부터였다. 현악기가 빠른 반복 하행 음형으로 거대한 크레셴도(점점 크게)를 만들며 열다섯 마디를 더 지나면서는 랄렌탄도(점점 느리게)가 더해져 마법 같은 고양감을 이끌어내다가 마침내 빠르기말이 아다지오로 바뀌면서 나오는 그윽하고 애틋한 트롬본 선율은 이 작품의 절정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여기서 긴 호흡으로 커다란 고양감을 제대로 이끌어내는 연주는 흔치 않다. 크레셴도의 폭이 너무 좁거나, 랄렌탄도 지시를 만나고도 별로 느려지지 않거나, 프레스토가 프레스토답지 않고 너무 느리거나 하는 연주가 많다. 오케스트라 연주력이 어지간히 뛰어나지 않고는 감당이 안 되는 모양이다. 크레셴도와 랄렌탄도를 동시에 잘 살리고도 앙상블이 흐트러져 현악기가 만들어내는 소노리티가 엉망이 되기도 한다.

서울시향은 크레셴도와 랄렌탄도를 꽤 잘 살렸다. 지휘자는 마디 449에서 과감하게 템포를 빠르게 잡고도 그 속도에 무너지지 않도록 영리하게 안전장치를 해두었다. 현의 크레셴도 폭이 좀 작았지만 그 대신 호른의 단음계 가락을 앞세워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동시에 현의 앙상블이 흐트러지지 않게 가려준 것이다. 결과는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트롬본 연주도 썩 좋았다. 아쉬운 데가 없지는 않았지만 서울시향이 이보다 잘하기는 어렵지 싶었다.

미코 프랑크가 서울시향을 지휘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처음에는 미처 몰랐는데, 가만 보니 젊은 지휘자와 젊은 악단이 닮았다. 서로 좌충우돌하면서 거장이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들을 많이 배웠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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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8.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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