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 연주회장이 없는 서울시향은 음향 엉망인 연습실에서 연습하지요.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서울시향이 오늘날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단원 실력을 키우기보다는 더 훌륭한 단원을 들여오는 식으로 성장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부 사정이 어떤지는 제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밖에서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관악기라면 몰라도 숫자가 많은 현악기 연주자를 그렇게 물갈이하기에는 예산 문제가 걸립니다. 단원들에게 직업 안정성도 웬만큼 보장해야 옳겠고요. 악단이 발전하려면 솜씨 좋은 단원을 들여오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미 있던 단원들이 다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음향 환경을 갖춘 연습 공간을 마련해 줘야 합니다. 전용 연주회장이 있어서 그곳에서 연습할 수 있다면 가장 좋고, 그것이 어렵다면 연습실이라도 음향 설계가 제대로 된 곳이 필요합니다.
이런 얘기를 트위터 등으로 떠들었더니 국내 주요 악단 단원 및 관계자 여러분이 기막힌 사실을 알려 왔습니다.
첫째, 우리나라에는 연주회장에서 연습하는 악단이 단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KBS 교향악단 등 전용 연주회장이 있는 오케스트라도 평소에 연습은 연주회장에서 하지 못하고 따로 마련한 연습실에서 한다네요. 주요 시립교향악단은 악단이 소속된 기관과 연주회장이 소속된 기관이 달라서 연주회장을 쓰려면 대관료를 내야 한다는군요.
둘째, 제가 음향 엉망이라고 했던 서울시향 연습실이 사실은 그나마 국내 최고 수준이라고 합니다. 어지간한 오케스트라는 연습실이 지하인데다가 그나마 꾸준히 쓸 수 있는 연습실이 없는 곳도 더러 있다고 합니다.
연습실이 지하라는 사실은 얼핏 생각하기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입니다. 악기는 온도와 습도에 몹시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악기는 그나마 나은 편이고, 18세기 이전 악기에는 아마도 치명적일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고음악이 잘 안 되는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실내음향 설계는 둘째 치고 항온항습 시설도 안 된 곳에서 연습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국내에서 손꼽아 주는 모 오케스트라 단원은 연습실 음향이 실제 연주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현 소리가 큰 연습실에서 오래 연습하면 연주회장에서 관 소리가 크게 나옵니다. 관 소리가 작은 곳에서 연습하면 관 소리가 거칠어지고요. 저음이 많은 곳에서 연습하면 연주회장에서는 저음이 작아지겠죠. 악기간 밸런스와 음색뿐 아니라 앙상블 타이밍도 중요합니다. 음향이 나쁜 곳에서 연습하면 '패스'가 연결이 안 될 때가 잦거든요. 소리가 메마른 연습실에서 연습하면 연주회장에서는 세부 표현이 뭉개질 수 있고, 초기 반사음이 많아서 잔향이 진한(wet) 곳에서 연습하면 연주회장에서는 개별 악기 소리가 너무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축구 선수들, 옛날에는 연습을 맨땅에서 하다가 국제 경기에 나가면 잔디밭에서 헛발질하곤 했지요. 국내 악단 사정이 비슷하다는 얘기를 제가 언젠가 연주회 리뷰에 쓴 일이 있습니다. 찾아보니 참 옛날 글이라 부끄러워서 링크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참으로 많은 악단 연습실이 맨땅도 아니고 진흙탕이었네요.
이런 열악한 사정은 널리 알리고 공론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내 주요 악단 연습실 현황을 알아봤습니다. 덧붙일 내용을 아시는 분은 댓글, ☞트위터, ☞페이스북, ☞이메일 등으로 알려 주세요.
▶ 지상 연습실을 쓰는 악단
서울시향 : 세종문화회관 구관 4~6층. 소규모 개인 연습실도 있음
KBS향 : KBS 본관
수원시향 : 야외음악당 연습실
코리안심포니 : (3월 30일 고침) 예술의 전당 국립예술단체 공연연습장
충남시향 : 문예회관 연습실
전주시향 : 구 시립 공예품 전시관
▶ 지하 또는 반지하 연습실을 쓰는 악단
경기필 : 경기문화의 전당 반지하
부천필 : 시민회관 지하
인천시향 : 문예회관 지하
부산시향 : 문예회관 지하
군포프라임필 : 문예회관 지하
※ 이 가운데 음향 설계가 제대로 된 곳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금 다른 얘기지만, 연습실만큼은 아니더라도 국내 주요 연주회장 음향 환경 또한 문제가 많다는 사실은 제법 잘 알려졌지요. 제가 쓴 연주회 리뷰 가운데 연주회장 음향을 언급한 글을 모아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