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라벨 음악이 항상 그렇듯이, 아름답게 세공된 표면 아래에서는 감정이 타들어 간다. 각 악장은 전투에서 사망한 벗들에게 헌정되었다. 고풍스러운 양식으로 흘러가는 음악은 마치 유령의 행진처럼 느껴진다. 근육에 대한 암시와 금속의 번뜩임에 대한 암시도 있다. 글렌 왓킨스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의 음악에 관한 연구에서, 라벨이 토카타 악장의 카랑카랑한 음으로 전투기의 곡예비행을 연상시키려 했다고 주장했다. 라벨은 창공을 홀로 비행하는 영웅이 되기를 꿈꿨다.”
음악평론가 알렉스 로스가 쓴 책 “나머지는 소음이다”에 나오는 말입니다. 모리스 라벨의 걸작 ‘쿠프랭의 무덤’ 얘기지요. (제가 가진 책이 번역서가 아니라서 인용문은 그냥 제가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김병화 선생의 훌륭한 번역서도 있어요.) 라벨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공군에 자원입대하려다 실패하고는 운전병으로 입대해서 군용 화물 트럭을 운전했습니다. 글렌 왓킨스가 했다는 주장은 그래서였을 겁니다.
라벨이 배치된 곳은 끔찍하기로 유명했던 베르됭 전투의 최전방 바로 뒤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독일군과 프랑스군을 합쳐 무려 240만 명 가까운 군인들이 동원되었고, 양측의 소모전으로 사상자가 80만 명 가까이 났다는 끔찍한 전투였지요. 한 프랑스 군인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지옥도 이보다 더 참혹할 수는 없다. 여기에 있는 우리는 모두 미쳤다.”
어느 날 라벨은 폐허가 된 마을에 버려진 성에서 에라르 피아노를 발견하고는 쇼팽 곡을 연주해 보았다고 합니다. 알렉스 로스는 라벨이 적막한 폐허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경험으로 ’쿠프랭의 무덤’을 작곡하게 되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이 만들어내는 환상이 폐허로 변한 현실에 덧씌워지는 것은 ’쿠프랭의 무덤’이라는 작품이 주는 느낌 바로 그것이지요.
’쿠프랭의 무덤’이라는 제목은 바로크 시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곡가 프랑수아 쿠프랭(François Couperin)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작품의 선율과 리듬과 화성 등은 바로크 시대의 우아함을 간직하면서도 어딘가 조금씩 비틀려 있고, 때로는 음산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알렉스 로스가 말한 것처럼, “고풍스러운 양식으로 흘러가는 음악은 마치 유령의 행진처럼 느껴”집니다.
이 작품의 악장 구성은 바로크 시대 모음곡과 비슷하면서도 진짜 바로크 시대의 표준에서는 벗어나 있습니다. 이를테면 바흐 모음곡의 악장 구성이 ① 전주곡 ② 알르망드 ③ 쿠랑트 ④ 사라방드, ⑤ 가보트·미뉴에트·부레 등 ⑥ 지그 순서라면, ’쿠프랭의 무덤’은 ① 전주곡 ② 푸가 ③ 포를랑 ④ 리고동 ⑤ 미뉴에트 ⑥ 토카타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덤, 현실과 환상의 병치, 옛 음악 양식의 현대적 비틀림 등에서 떠오르는 음악이 있습니다. 윤이상 선생의 1968년 작품 ‘영상’(Images)입니다. 윤이상은 강서고분, 그러니까 ’무덤’에 있는 벽화 ’사신도’를 보고 영감을 받아 이 곡을 썼다고 하지요. 고구려 무덤을 지키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는 어둠 속에서 강렬한 색채로 빛났고, 넷이면서 동시에 하나로 어우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윤이상은 강서고분벽화를 보러 평양에 갔다가 그만 간첩 혐의를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곳에서 자살 시도까지 했다가 서울대학병원에 이송되어 그곳에서 ’영상’을 작곡했다고 하지요. 음악학자이자 국제윤이상협회장인 볼프강 슈파러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캄캄한 방은 감옥이다. 이것이 음악적으로는 저음, 경직됨과 움직임 없음으로 시작해 조금씩 움직임과 활기가 늘어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음악이 완전히 멈춘 뒤에 모든 성부가 터져 나와 흩어지며 두 번째 부분이 시작되고, 이것이 함께 울리는 명확한 화음으로 합쳐지며 위로 솟아오른다. 조화를 향해 상승하는 움직임은 불안정한 것으로 드러나며 다시 한번 흩어진다. 점점 더 위를 향하는 화음은 감옥 벽을 향해 외치는 절규로 해석되었다.”
통영국제음악당에서는 ‘쿠프랭의 무덤’과 ’영상’ 등을 7월에 공연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상황이 어찌 될지 몰라서 걱정입니다. 7월이 되면 전 세계에 창궐한 바이러스가 잠잠해지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쿠프랭의 무덤’과 ’영상’을 공연장에서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