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7일 일요일

윤이상의 귀향

'THE MOVE'에 기고한 글입니다.


베를린에서 출발한 음악가들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목적지인 통영으로 이동하는 내내 텔레비전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이 보였다. 함께 나오는 모든 사람이 화를 내고 있거나 심각한 표정이었다.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이들은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다. 그동안 잠을 자고 있던 한국인 단원에게 설명을 들은 것은 늦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였다. 이날은 박 전 대통령의 구속 여부가 결정되는 날이었고, 이 음악가들은 '윤이상 솔로이스츠 베를린'이었다. 한국인 단원 정은비 씨가 나중에 전해준 이야기다.

윤이상 솔로이스츠 베를린 단원 가운데는 플루티스트 로스비타 슈테게(Roswitha Staege)나 오보이스트 잉고 고리츠키(Ingo Goritzki)처럼 윤이상 음악을 수십 년 동안 연주해온 연주자도 있고, 첼리스트 옌스 페터 마인츠(Jens Peter Maintz)나 호르니스트 프르제미슬 보이타(Přemysl Vojta)처럼 윤이상 음악에 관심 있는 세계 정상급 연주자도 있고, 첼리스트 요나탄 바이글레(Jonathan Weigle), 바수니스트 유성권, 플루티스트 지샹천(纪相臣), 타악기 연주자 정은비 등 젊고 탁월한 연주자도 있다.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윤이상의 고향 통영에서 윤이상 음악을 연주한 일은 이들에게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사명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대기실 풍경이 "결연에 찬 모습"이었으며 연주가 끝났을 때 목이 멨다고 그날을 기억하는 연주자도 있었고, 베를린에서 같은 곡으로 이미 공연을 하고 온 사람들이 통영에서 온종일 연습하고도 모자라 예정된 시각을 훨씬 넘겨서까지 연습을 끝내지 않는 모습에 공연기획자인 글쓴이가 혀를 내둘렀던 기억도 난다.

"베를린은 윤이상의 음악이 명성을 떨친 곳이고 그에게 모든 예우를 갖춘 도시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신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 통영을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그리워했습니다. 그런 그의 고향에서 우리는 한국인 관객에게 연주해야 했습니다. 베를린에서 그가 어떤 음악을 해왔는지, 얼마나 훌륭한 작업을 이어왔는지, 베를린에서 온 우리는 하나도 남김없이 들려드리고 싶었습니다. 당신들의 나라에 얼마나 위대한 음악가가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첼리스트 요나탄 바이글레의 말이다.

"한국 현대음악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윤이상이 동백림 사건으로 납치되어 귀국하게 된 사건이다. '작곡가' 윤이상의 '정치적' 행위 때문에 현대음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크게 일었고, 신문 지상에 윤이상과 현대음악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며 일반인들에게 현대음악의 존재가 널리 알려진 것이다." ― 이희경, 『메트로폴리스의 소리들』, 330쪽.

음악학자 이희경은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의 음악사적 의의를 이렇게 평가했고, 서구적 의미의 '작곡가'로서 본격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준 최초의 한국인으로 윤이상과 김순남을 꼽기도 했다. 유럽에서 윤이상은 "동양의 사상과 음악 기법을 서양음악 어법과 결합해 완벽하게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윤이상기념관 이중도 팀장의 증언에 따르면, 윤이상의 본격 출세작 ‹예악›(禮樂)이 초연되었을 당시 각국의 언론 보도를 스크랩한 종이를 쌓으면 사람 키 높이를 넘어섰다고도 한다.

동베를린 사건 이후 윤이상에게 작곡을 배운 강석희, 백병동, 김정길 등이 1970년대 이후 한국 작곡계를 이끌었다. 특히 강석희는 윤이상의 조언에 따라 한국 최초의 현대음악제인 서울국제현대음악제를 조직했고, 이것이 '범음악제'(Pan Music Festival)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윤이상의 수제자로 손꼽혔던 호소카와 도시오(細川俊夫)가 윤이상을 넘어서는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윤이상은 더 한국적인 (또는 동아시아적인) 울림을 담아내는 방향으로 자신의 음악 양식을 꾸준히 변화시켰다. 그러나 음악에 담긴 동아시아적 요소를 서양인들은 그다지 섬세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일본이나 중국과 다른 한국적 요소에 대한 서양인의 이해는 더욱 얕을 수밖에 없었다. 유럽인의 시각으로 본 윤이상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더 많은 '협화음'을 작품에 허용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최첨단 현대음악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윤이상의 음악은 더 쉬워지는 동시에 더 어려워졌다.

윤이상 음악은 동서양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에 있다. 그리고 음악학자 윤신향은 윤이상에게 동서양 문화가 대등하지 않았음에 주목하며 윤이상 음악이 동서양 음악의 융화라는 시각을 반박한다. "두 세계 사이의 진정한 융화는 작곡자의 삶이 음악어휘를 결정할 때마다 그늘처럼 은폐되는 한국적 정신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그곳에서만 가능하다."

윤이상 음악 언어의 뿌리 중 절반은 베를린/유럽에, 나머지 절반은 통영/한국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독일의 '원류'를 조금이라도 더 한국에 가져오는 노력이 한국 음악계에 필요하다. 윤이상 솔로이스츠 베를린을 통영국제음악제에 초청한 일이 그 때문이기도 했다. 2017 통영국제음악제를 취재한 독일 일간지 '타게스슈피겔'(Tagesspiegel)은 통영의 노력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조선업의 쇠퇴이래, 통영은 윤이상을 필두로 하여 문화도시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그의 존재는 아주 현대적인 스타일의 음악당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음악당은 1300여 석을 갖췄으며, 멀리서도 잘 보이는 성지(聖地)로서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통영국제음악제는 고국을 평생 그리워하던 영웅 오디세우스의 늦었지만 명예로운 귀환을 알린다."

그리고 2018 통영국제음악제의 주제는 '귀향'(Returning Hom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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