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 애호가 사이에 고수(高手)는 실내악을 듣는다는 속설이 있지요.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나이 마흔 넘으면 현악사중주를 즐겨듣게 될 것이라는 선배님들 말씀이 옳더라고도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음악 애호가가 '내공'이 높아지면 실내악파, 오페라파, 고음악파, 현대음악파 등으로 취향이 갈라지거나, 또는 아예 그런 취향이 없어지는 경향이 있는 듯해요.
그런데 이른바 '실내악 종착역론'은 그 역사가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아니, 배경 설명까지 하려면 18세기 얘기부터 해야 합니다.
고전주의 음악 양식이 나타나던 시기에 서양음악의 중심지가 교회와 궁정에서 귀족의 살롱으로 바뀌고, 나중에는 시민사회 담론과 더불어 시민이 참여하는 공공음악회가 열리고, 다른 여러 요인이 맞물리면서 '교향곡'이라는 장르가 뿌리를 내립니다.
교향곡은 새 시대의 '블록버스터' 음악 장르가 됩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 베토벤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베토벤 교향곡이 너무나 훌륭해서 후대 작곡가들에게 넘을 수 없는 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토벤이 남긴 음악 유산이 심각한 딜레마가 되기도 했습니다. '노래의 날개 위에'로 대표되는 낭만적이고 소품적인 선율이 베토벤식 주제 발전 기법과 맞지 않았거든요.
19세기 교향곡의 역사는 '베토벤 딜레마'를 극복하려는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리스트 등이 저마다 '아이디어'를 짜내 문제에 도전했고, 바그너는 '베토벤 이후 교향곡은 죽었다'라는 선언과 함께 새로운 방향에서 혁신을 이끌었지요. 그리고 브람스는 섣부른 '꼼수'를 쓰는 대신 베토벤의 유산을 극한까지 발전시킴으로써 문제를 정면 돌파했습니다.
베토벤의 진정한 후계자가 누구이냐를 놓고 유럽 음악계는 '브람스파'와 '바그너파'로 나뉩니다. 세력은 브람스파가 우세했지만, 어느 음악학자가 리스트, 바그너, 베를리오즈를 묶어 '이 시대의 진보적인 음악가'라 선언하는 등 바그너파가 '진보' 담론을 선점하면서 명분을 쥐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브람스파의 대응 논리가 바로 '실내악이야말로 고급 감상자를 위한 음악'이라는 것입니다. 바그너 오페라, 리스트 교향시 등은 상업적인 음악이고, 브람스 등의 실내악은 예술적인 음악이라는 주장이지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 쇤베르크가 해묵은 대결 구도를 새로운 국면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1910년 즈음에 판이 바뀌었다. 실내악에 혁신이 일어나 무조성으로 옮겨갔으며 쇤베르크는 음악사학자들의 도발과 멸시에 맞서 "진보왕 브람스"(Brahms the Progressive)라는 구호를 앞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변증법에 걸맞은 반전이며 1860년 즈음에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보수주의자들에게 실내악은 가장 뛰어난 음악 장르였고 […] R. 슈트라우스가 전통으로 돌아서고 나서 진보라는 횃불을 받아든 쇤베르크는 […]" ― 카를 달하우스.
한편, 시민사회의 형성과 함께 대편성 관현악이 서양음악의 중심이 되면서 오케스트라를 위한 공연장이 '대세'가 되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큰 공간에서 실내악을 연주하면 작은 편성에서 오는 섬세함과 아기자기함이 광막한 공간 속으로 허무하게 사라지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실내악 공연은 작은 공연장이나 또는 음향이 매우 뛰어난 공연장에서 감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은 세계 어느 공연장과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탁월한 실내음향을 자랑합니다. 국내외 여러 공연장을 다녀 본 제가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아주 작은 소리도 또렷하게 전달하는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은 실내악과도 아주 잘 맞습니다.
올해는 우리나라에 좋은 실내악 공연이 유난히 많은 해인 듯합니다. 통영국제음악당에서도 주커만 피아노 트리오, 디오티마 콰르텟, 금호아시아나솔로이스츠, 아벨 콰르텟 등이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지요.
그리고 오는 6월 12일에는 어쩌면 '올해의 실내악 공연'이 될지도 모르는 예루살렘 콰르텟 공연이 있습니다. 모차르트 현악사중주 14번 K. 387, 야나체크 현악사중주 2번 '비밀편지' 그리고 슈베르트 현악사중주 14번 '죽음과 소녀'가 연주될 이번 공연을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