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재가 눈에 띄고 옛 영화가 아련해 지는 것은 역사의 순리고 흐름이다. 언제나 최고라고 생각했던 것이 더 이상 그 위용을 보여주지 못했을 때 이를 지켜보는 이들은 안타까움과 옛 향수에 젖어 들고 새로운 신성을 보았을 때는 반가움과 질시가 같이 쏟아지는 것도 세상사다. 클래식의 역사는 기존의 질서를 뛰어넘는 혁명적인 변혁으로 명맥을 유지해 왔다. 기존의 대가들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작품들이 차세대를 이어왔고 새로운 음악은 계속되어 답습되어 왔던 전시대(前時代)의 구태의연한 프로그램을 대체한다. 위태로울 만큼 거창한 큰 물결도 있었다. 이전 시대의 선법을 완전히 뛰어넘어 새로운 조성의 길로 인도한 바흐(J. S. Bach), 기존의 음악과는 완전이 동떨어져 자신만의 완전한 음악을 성취한 베토벤, 음악과 드라마의 혁신적인 융합을 보여준 바그너, 화성과 조성의 설계자 라모, 기존 2천년간 구축해온 조성의 역사를 완전히 무너뜨린 쉰베르크. 음악의 한계를 확장시킨 존 케이지. 이들의 발자취는 음악의 개혁이 얼마나 혁신적으로 일어 났는지, 또한 장구한 세월을 철벽처럼 버틴 기존의 음악체계를 뛰어넘는 것이 얼마나 험난한 가를 동시에 보여준다.
연주의 세계 또한 마찬가지다. 이전까지 세계 무대에 설 수 있을 정도라고 호평했던 연주단체가 처참할 정도로 무너지기도 했고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무서운 신예들이 빛을 발하기도 한다. 이름 값이 관중 수를 결정하는 철저한 위계에서 스스로의 노력을 게을리하고 발전하지 않은 연주자는 쓸쓸히 도태되고 그 자리는 수많은 후계자들에게 점령된다.
얼마 전 교향악 축제에서 과천시향의 연주는 기존의 답습된 질서에 큰 파장을 던졌다. 젊은 지휘자 서진이라는 특출한 신예는 이 오케스트라를 그야말로 환골탈태시켜 버렸다. 그들이 연주한 말러는 분명 세련되고 완벽하다고 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가슴을 울리는 무엇인가가 분명 존재했다. 거대한 음의 용광로에서 실타래처럼 뽑히는 선율들이 분명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인다. 전율스러운 절정이 듣는 이들의 감성을 뒤흔든다. 그 유명한 말러의 환희의 순간이다.
듣자니 그들은 무서울 정도로 연습에 매진했고 오케스트라의 구성원들은 젊은 지휘자를 믿었다. 젊은 지휘자는 그의 단원들에게 끈기와 성의로 음악을 설득했고 하나로 모았다. 이제껏 과천시향의 연주를 보아왔지만 한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경이로운 순간이다. 연주 끝에서 보인 그들의 표정은 프로의 모습이었다. 이들은 많은 관중들에게 분명 메시지를 전했다. 지금 한국 교향악계에 우리가 있다고, 출사표를 던진 것이라고. 어떤 이들은 이들의 연주력이 정단원보다 객원단원의 힘이라고 하지만 오케스트라를 아는 이라면 함부로 폄훼 할 수 없다. 기존에 호흡을 같이 하지 않던 멤버들로 이정도 성과를 냈다면 오히려 놀라운 것 아닌가.
기존의 이름있는 교향악단 중에 비참할 정도의 결과를 보여준 쪽도 있었다. 과천시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지원을 받는 이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은 한 순간의 방심과 나태함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준다. 협연자에 기대는 것처럼 보일 만큼 이들의 연주는 무성의 했고 어떠한 특성이나 자기 주장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름 값만 믿고 불러온 지휘자는 한심스러울 정도의 음악이해도와 오케스트라 장악력을 보여 주었고 왜 저기 앉아서 연주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무성의한 연주자들도 보인다. 이들은 이들의 연주가 스스로의 목을 죄는 밧줄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알고 싶어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연주자가 망가지는 것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이 정도면 되겠지, 이만 큼만 하면 옛날만큼 되겠지. 어느 순간까지는 이전의 기량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지나면 곤두박질한다.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제어가 불가능 할 정도다.
그러나 이것이 세상이고 자연의 법칙이다. 기존의 강자가 도태되고 새로운 세력이 계승한다. 그나마 이것이 신분 상승이 제약된 불행한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일말의 구원의 메시지로 보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