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3일 일요일

2007.04.29. 첸이 '모멘텀' / 로드리고 아랑후에즈 협주곡 /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 시엔 장 / 서울시향

2007년 4월 29일(일)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휘자 : Xian Zhang
협연자 : Xuefei Yang(Guitar)

Chen Yi: Momentum (13')
Joaquin Rodrigo: Concierto de Aranjuez (21')
Tchaikovsky: Symphony No. 5 in e minor, Op.64 (50')



나중에 붙임:

'张弦'은 '장셴'
'陈怡'는 '천이'
'杨雪霏'는 '양쉐페이'가 올바른 외래어 표기법인 듯.



첸이(Chen Yi; 陈怡; 1953-)는 중국 음악의 유산을 서양음악 어법과 결합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윤이상과 비교될 수 있는 작곡가다. <모멘텀>은 만리장성으로 대변되는 거대한 이미지와 중국음악 특유의 '앵~' 하는 선율적 특성, 그리고 부분적으로 사용된 클러스터 기법 등이 특징적이었는데, 중국적인 음 소재가 서양 사람들에게 어필할지는 모르지만 기법적 측면에서 그다지 새로운 점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은 아쉬웠다. 특히 중국적 특징이 선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점은 장점보다는 단점으로 느껴졌으며, 중국 민속 선율을 노골적으로 사용한 부분은 유치하기까지 했다면 이는 과문한 나의 편견 탓일까, 아니면 윤이상이라는 거장과 나란히 비교한 탓일까. 외람되지만 민족적 정체성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냥 한 명의 예술가로서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작곡가도 있지 않던가? 진은숙 말이다.

로드리고의 <아랑후에즈 협주곡>을 연주한 쉬에페이 양(Xuefei Yang; 杨雪霏; 1977-)은 '양설비'라는 한국식 발음이 예쁜데, 외모 또한 늘씬한 것이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기타 연주는 정열적이라기보다는 단단하고 또랑또랑했으며, 선이 가늘면서도 시원시원했다. 잘 다듬어져 세련된 음색은 어떤 면에서는 지난 1월에 내한했던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와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재미있게도 두 사람 다 앙코르로 타레가(Francisco Tárrega)의 알함브라의 추억을 연주했다. 쉬에페이 양은 첫 번째 앙코르로 로드리게스(Gerardo Matos Rodríguez)의 라쿰파르시타(La Cumparsita)를 들려주었다.

이번 연주회의 키워드가 '중국 여성'이라면, 이날 소개된 작곡가와 독주자와 지휘자 중에 가장 돋보인 중국 여성은 지휘자 시앤 장(Xian Zhang; 张弦)이었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연주는 감정 변화의 폭이 상당히 큰 편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일부 러시아 지휘자들처럼 광포한 금관이 다른 성부를 압도해버리는 식이 아니라 템포와 다이내믹의 계산된 변화를 통해 그러한 효과를 불러왔다. 고백하건대 나는 차이콥스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슬라브 풍의 감상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날 팀파니 주자가 앞장서서 오케스트라의 전체 음색을 묵직하게 이끌어나가곤 했던 것은 매우 마음에 들었다. 말하자면 팀파니는 이날 연주를 '러시아 음악'이 아닌 '유럽 음악'으로 만드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으며, 연주가 끝난 다음 지휘자가 팀파니 주자를 일으켜 세우지 않은 것으로 보아 팀파니에 대한 나의 찬사는 지휘자가 아닌 팀파니 주자에게 돌아가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템포는 다소 빠른 편이었으며, 특히 2악장 마디 39(Poco più animato)에서 경사가 가파른 아첼레란도를 사용하여 클라이맥스로 가는 강한 흥분을 유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2악장 마디 128(Più mosso)에서 콘트라베이스의 '뽕짝 리듬'을 강조한 것은 이날 보여준 해석 가운데 가장 참신하다고 느꼈다. 말러적인 반어법을 생각나게 하는 이 부분은 사실 악보에 뻔히 있는 지시를 따른 것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내가 그동안 음반으로 접해본 연주들에서는 이 부분의 베이스 리듬을 이렇게까지 강조하지 않았던 것은 신기하다. 지휘자는 이 부분에서 콘트라베이스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린 채로 지휘하여 시각적인 효과도 훌륭했다.

3악장에서 중간의 그로테스크한 면을 부각시키지 않고 세련되게만 연주한 것은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었다. 바순의 헤미올라(hemiola) 리듬에 의한 독주(마디 56)는 시작 부분에서 템포를 일시적으로 살짝 늦추었고, 피아노(p)에서 포르테(f)로 가는 크레셴도의 폭이 약했으며, A# 음의 악센트는 하행 도약으로 말미암아 소리가 작아지는 것을 막는 정도로만 처리하는 등, 왈츠 리듬 사이에 마치 파티의 불청객처럼 갑자기 끼어든 이질성을 중화시키기 위한 장치를 사용했다. 이어지는 현악기군의 스피카토 음형 또한 세련되고 유쾌한 해석으로 일관했다. 1악장 마디 119와 135 등의 옥타브 하행 음형에서 플루트(바이올린) 소리만 또렷하게 들리고 클라리넷-바순(비올라-첼로)으로 갈수록 음량이 약해진 것은 옥에 티였다. 이것은 악기의 음역에 따른 음향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고음은 좀 더 줄이고 저음으로 갈수록 음량이 커질 필요가 있다.

이날 가장 돋보인 악기는 2악장 첫머리에서 멋진 독주를 들려준 호른이었다. 지휘자는 연주가 끝난 직후 가장 먼저 호른 수석 주자를 일으켜 세웠으며, 호른 파트 전체가 안정된 연주를 들려준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4악장 코다의 템포가 느려지는 부분(마디 472)에서 음량 조절에 실패한 것은 아쉬웠다. <아랑후에즈 협주곡>에서도 호른이 엉뚱하게 돌출된 부분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매우 훌륭한 연주를 했으면서도 이렇게 옥에 티를 남기는 것은 호른 연주자들의 얄궂은 운명이기도 하다.

이날 연주회는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의 악장인 스베틀린 루세브(Svetlin Roussev)가 데니스 김과 함께 서울시향의 공동 악장으로 선임된 이후 악장을 맡은 첫 정기연주회였다. 그래서인지 현 소리가 좀 달라지기는 했는데, 아직은 두고 볼 일이다. 프랑스인(원래는 불가리아인이라고 한다.)이 한국 악단의 악장을 맡은 것은 리더쉽의 측면에서 단점이 될 소지도 있겠지만, 단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상호 신뢰를 높임으로써 루세브가 지닌 장점이 서울시향에 최대한 발휘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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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7.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 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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