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의 자리
한국 관현악단에서 지휘자를 채용하는 기준이 뭘까. 실력, 단원들과의 유대, 진취적인 방향성, 대중성 등이 중요한 채용 이유가 될 듯한데 요즘은 꼭 그렇지 만도 아닌 것 같다.
물론 지휘자의 기본적인 조건을 중요하게 보는 관현악단도 있다. 예산이 확보되어 있고 어느 정도는 음악에 집중할 수 있게 여건이 되는 관현악단은 되도록이면 지휘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지휘자를 선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향악단들은 충분한 예산이 확보되어 있지 않고 민간 오케스트라의 경우 후원과 기타 공연에 목숨 걸기 때문에 지휘자에게 또 다른 능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단체장의 정치적 색깔에 따라서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이가 지휘봉을 잡게 되는 일도 있다. 저번 KBS 교향악단의 사례도 도대체 누가, 왜, 그 사람을 영입했는가가 단원들의 궁금증이었다. 한국의 단체장들은 참으로 음악에 높은 안목을 가진 것 같다. 전문가도 힘든 지휘자 인선을 임의대로 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서울, 서울 근방, 그리고 지방의 많은 교향악단, 합창단에서는 단체장이 바뀌거나 정치적 색깔이 달라지면 예술감독과 지휘자가 바뀐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휘자 자리도 공기업 낙하산인줄 아는 이들에게 뭐라고 설명할 의욕도 없다.
더 큰 문제는 대놓고 지휘자에게 원래의 임무 외에 다른 것들을 요구하는 거다. 계약서에 명기된 연주회 이외의 공연을 요구하는 것은 일각에 불과하다. 지휘자의 업무를 거의 사무원처럼 부여하는 관현악단도 적지 않다. 그들에게 필요한 지휘자는 한 단체를 이끌며 예술활동을 하는 이가 아니라 그들의 말을 잘 듣는 충견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다용도로 지휘자를 쓰는 곳일수록 박봉일 경우가 많다.
지휘자에게 도대체 왜 학연, 지연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서류상으로만 모든 능력 있는 지휘자가 지원 가능하게 해 놓고 실제로 그들이 영입하는 지휘자는 그 지방 출신, 아니면 인맥과 학연으로 단단하게 결탁된 이들이다. 지겨운 임용 변명도 변하지 않는다. 지역사회를 잘 이해하고 단원과의 교분이 두터운 명망 있는 지휘자라고, 솔직히 그들이 얼마나 명망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지역사회를 이해하는 것이 지휘자와 무슨 연관이 있겠나. 단원들과의 교분이 두터운 것은 양날의 칼이다. 단원들의 지지를 얻는 좋은 지휘자는 봤어도 교분이 두터운 훌륭한 지휘자는 들은바 없다.
서울 근방에서 오랜 시간 동안 훌륭하게 교향악단을 키워놓은 중견 지휘자가 자리를 옮기면서 자신의 제자를 집어 넣은 것은 누가 봐도 어색하다. 한국 사회 특유의 학연 문화가 더 이상의 불만을 외부에 분출하는 것을 막고 있지만 관현악단 단원들의 사기는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자기가 만들고 키워놓은 관현악단에 대한 예의도 아닐뿐더러 좋지 않은 선례들을 계속해서 만들고 있다는 것이 앞으로 문제로 대두될 것이다.
능력 있는 유럽의 지휘자가 한국의 교향악단 지휘자 공모에 응모했는데 고배를 마셨다. 지휘능력과 음악적 능력에 대해서는 다른 지원자를 압도하지만 사무능력과 지역안배라는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그럴 바에는 처음부터 정확하게 자신들이 필요한 지휘자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이 지휘자는 오디션을 위해 자기 시간과 항공료까지 부담하며 한국에 왔다. 누가 봐도 들러리 세운 이 지휘자에게 과연 누가 제대로 된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한국의 관현악단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좋은 단체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문제는 좋은 관현악단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고 결과만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도둑놈 심보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