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9일 목요일

소프라노 임선혜 2020년 인터뷰

제가 예전에 했던 인터뷰인데 공연이 성사되지 못해서 잊어버리고 있다가 이번에 발견해서 올려 둡니다. 인터뷰에서 말한 공연은 코로나-19로 인해 2020 통영국제음악제 전체가 취소되어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외트뵈시 ‹시크릿 키스›는 2024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소프라노 소피아 부르고스 협연, 바스 비허르스 지휘 클랑포룸 빈 공연으로 한국초연됐습니다.


Q. 최근에 새 음반을 내시고 서울에서 쇼케이스도 하셨습니다. 음반 자랑 좀 해주세요.

A. 새 음반은 고대의 가장 슬픈 사랑의 운명을 가진 여인이라 할 수 있는 ‘다이도’(Dido, Didone 디도, 디도네)의 노래만으로 엮은 것입니다. 권력에 눈이 먼 남동생이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하자 다른 나라로 피신해 카르타고라는 왕국을 세운 영리하고 기지가 있으며 의기당당한 다이도. 그녀는 이탈리아로 가던 길에 이곳에 당도한 전사 아에네아스와 사랑에 빠지고 행복해하지만 그는 어느 날 자신의 목표를 상기하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배를 타고 떠납니다. 돌아오라는 외침에도 답이 없는 애인의 배신으로 슬픔, 절망, 치욕을 느끼는 사이 그녀의 왕국 카르타고는 불타기 시작하고, 그녀는 자신의 고단했던 운명에 이별을 고하며 불에 뛰어들고 맙니다. ‘버림받은 다이도’는 메타스타지오의 오페라 대본가로서의 데뷔작인데 당시 너무도 인기여서 무려 60편의 음악 작품이 탄생했다지요. 이 중 18세기 이탈리아 스타일로 쓰여진 곡들만 모은 것인데, 한 평론가는 ‘노래 시작 몇 초만에 감전된 듯’ 하다며 ‘전적으로 센세이셔널, 압도적이다’라고 음반에 호평을 했네요. 서독일라디오방송에서는, 덜 유명한 작품들로 이루어졌지만 가치 높은 작품들을 알게 한 이 음반은 노래와 반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라고 극찬을, 베를린라디오에서는 ‘선혜 임은 음들을 유연하게 파도타는 노련한 비치 서퍼’ 같다며, '15년 전 음반들과 비교했을 때 이제 더 이상 기교로 지저귀는 새가 아니라 서정적이고 내적인 것을 노래하는 새로운 깃털로 갈아입은 것 같다’라는 재밌는 표현을 선물해 주었네요. 20년 만에 털갈이 한 건가요? ^^ ‘비치 서퍼’라는 새로운 별명이 이제 더 맘에 듭니다! ^^

Q. 2015년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 공연, 2017년 뤼벡 합창 아카데미의 바흐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공연 이후 이번이 세 번째로 통영국제음악당에서 공연하실 예정이신데요, 이번에 다시 한번 협연할 뤼벡 합창 아카데미는 임선혜 선생님께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A. 통영국제음악당은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음향을 자랑하는, 외국 음악가들에게도 유명해진 공연장입니다. 두 번 다녀간 적이 있지만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또 다르고 특별한 기분인데요. 이제 그 역사와 전통을 조화롭게 이루어낸 이 음악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 음악제로 외국에서도 유명해졌기 때문입니다.

합창에 열정이 대단한 롤프 백 지휘자님이 이끄는 이 아카데미와의 재회도 반갑습니다. 독일적 합창 전통을 이어가지만 여러 나라의 젊은 성악가들로 이루어진 합창단이어서 그 울림이 더 특별하지요. 더구나 이번 페스티벌에서는, 드라마틱함 뿐 아니라 가사의 유머러스한 표현과 재치 있는 리듬을 선사할 ‘카르미나 부라나’로 함께 하게 되어 그들의 활약이 몹시 기대가 됩니다. 

Q. 뤼벡 합창 아카데미와 협연할 '카르미나 부라나'는 소프라노 입장에서 어떤 곡인가요? 이 곡을 전에 공연하셨던 경험도 궁금합니다. 

A. 늘 기회가 안 맞았다가 마침내 지난해 여름, 크리스토프 포펜(Christoph Poppen)이 음악감독으로 있는 포르투갈의 ‘마르방 페스티벌’에서 역시 폐막 야외 공연을 했습니다. 저의 독일 스승 롤란트 헤르만(Roland Hermann) 선생님은 작곡가 칼 오르프의 많은 작품을 그의 지휘로 노래하고 녹음하고, 초연도 한 분이어서 이 작품에 관한 이야기는 그간 많이 들었습니다.

1936년 작품인 ‹카르미나 부라나›는 칼 오르프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임이 틀림없죠. 특히 이 작품의 첫 번째 악장인 ‘오 운명의 여신이여 (O Fortuna)’ 는 누구라도 들어본 적이 있을 만큼 영화나 TV 광고에 많이 등장하는데 영국 BBC 방송국에 따르면 2009년 말 기준으로 가장 많이 연주된 클래식 음악으로 꼽혔다는군요. 제목을 해석하면 ‘보이언의 노래’라는 뜻인데, 옛부터 베네딕토 수도원이 있는 곳의 지역 이름이 바로 보이언입니다. 11-13세기에 수도자들이나 음유시인들이 쓴 세속적인 노래를 슈멜러(Johann A. Schmeller)가 1847년에 ‘카르미나 부라나’로 엮었는데, 거기서 발췌해 오르프가 그 음악적으로 세팅을 한 것입니다. 가사는 현대 유럽인들에게도 익숙하지 않는 세속 라틴어, 중세 독일어, 고(옛) 불어로 되어있는데, 그보다 단순한 화성과 큰 다이내믹, 유머러스한 리듬으로 듣는 이로 하여금 그 분위기에 금방 젖게 하는 대중성을 가지고 있지요. 

소프라노는 '사랑의 뜰’이라는 악장부터 등장해서 남녀의 사랑 에피소드를 전하는데 마침내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스런이여, 아~ 나의 모든 것을 바치리!’ 하며 클라이맥스를 만듭니다. 그 전 넘버가 노래하는 사람도 어깨춤을 추게 될 만큼 유쾌하고 재밌는 곡이기에 갑자기 그 노래를 멈추고 사랑을 고백하는 이 4마디는 분위기상으로도 좀 급작스러운데요, 지금껏 중저음을 주로 노래하다가 '높은 레(high D)’를 내야 하는 소프라노에게도 그러하지요.^^ 그 네 마디 안에 도약이 큰 널뛰기로 올라간 고음에서 페르마타로 머물며 사랑하는 이를 부르고, 기품 있게 또는 빠르게 하강하는 셋잇단음표들, 그리고 스타카토로 조심스럽게 올라 마침내 고음에 도달하여 사랑의 탄성을 완성한 후 ‘내 모든 것을 주겠다’고 강조하면 마침내 그 임무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스릴 넘치는 4마디라고 해도 될까요! ^^ 물론 임무를 잘 완성한 다음의 카타르시스는 어마어마합니다!^^

Q. 리사이틀 프로그램 중에 윤이상 초기 가곡 중 '그네'와 '달무리'가 있습니다. 어떤 곡이며 이 곡을 부를 때 어떤 발성 원칙이 필요할까요?

A. 1994년 발간된 ‹윤이상 초기 가곡집› 첫 페이지에 윤이상 선생님께서 직접 쓰신 글이 있는데 이 글이 그 무엇보다 좋은 대답이 되지 않을까 싶어 적어봅니다.

“이 책을 내면서 나는 1950년에 부산에서 "달무리” 라는 가곡집을 출판한 바 있다. 책이 몇 군데 서울과 부산의 책방에 배부된 직후에 전쟁이 일어나 종적을 잃어버리고 이 곡들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그 뒤에 한두 곡이 종합가곡집에 실린 일도 있으나 40년이 지난 오늘, 나는 이 5개의 가곡을 묶어 원형 그대로 출판하면서 다시 우리 민족 앞에 늦으나마 선보이고자 한다. 이 곡들 은 1945년을 전후하여 작곡되었으며, 우리 민족의 그 시기의 작곡적인 소재지를 모색, 검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곡들을 다시 냄에 있어서 내가 바라는 것은, 비록 성악가가 서양 발성법을 구사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약간의 우리 전통 음악이나 민요의 선적, 율동적, 색채적인 묘미를 가미해서 불러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1994년 6월 20일 베를린에서

윤이상"

“그네"는 통영 출신 시인 초정 김상억의 ‘추천(그네)’라는 시에 붙인 곡입니다. 동향인 두 분이 20대에 의기투합해 만든 다른 작품으로 ‘봉선화’ (비 오자 장독간에...)가 있는데, 남망산 공원에 그 시비가 있다고 하지요. 윤이상 선생님은 이 시를 “편지”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가곡집에 실었습니다.

시인은 시 “무궁화”를 발표한 후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함북 웅기로 유랑을 떠났다가 귀향해 ‘남원서점’을 경영하였고, 해방 후 김춘수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하여 예술운동을 했으며, 11월 삼천포문화동지회를 창립, 한글운동, 교가 보급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달무리”는 청록파 시인 중 한 분인 박목월의 시로 ‹청록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시인 박목월은 정지용 선생이 ‹문장›에서 ‘북에는 소월이 있었으니 남에는 박목월이가 날 만하다’라고 했을 만큼 주목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필명 중 ‘월’도 존경하는 소월에서 따왔다고 하니 그에게 더없는 찬사였겠지요. 윤이상 선생님은 “달무리” 외에도 이 시인의 시 중 역시 ‹청록집›에 수록된 “나그네”에도 곡을 붙였습니다. 이 시는 이번 리사이틀에서 정태봉의 가곡으로 부를 것입니다. 

평소 윤이상 선생님의 초기 가곡을 많이 불렀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이 곡에 클라리넷과 같이 연주해 보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촉망받는 작곡가, 지휘자로 평가받는 윤한결의 편곡으로 클라리네티스트 김한과 같이 이 곡들을 이번 음악제에 선보이게 되어 기쁩니다.

윤한결은 곡 자체에 한국적인 요소가 많아 클라리넷의 유연함을 이용해 대위법적인 추임새를 추가해 보았다고 말합니다. 부디 우리 전통음악과 민요의 선적, 율동적, 색체적인 묘미를 강조하신 윤이상 선생님의 뜻에 후배들이 드리는 좋은 응답이 되기를 바랍니다.

Q. 김순남, 이건우, 나운영 등의 가곡은 어떤 매력이 있나요?

A. 한국 근대 현대음악사에서 1988년 납·월북음악인의 작품규제 해제조치’가 있기까지 작품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로, 월북 음악인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역사적 평가나 연주가 외면당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예술성을 간과할 수 없는 김순남, 이건우 두 작곡가가 있습니다. 민족주의 정서를 기반으로 하는 이들의 작품은 표현주의적이고 현대적인데, 우리의 전통적 리듬과 선율을 담았다는 면에서 한국 가곡이 예술가곡으로서 갖는 가치를 새롭게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2011년 스위스의 한 가곡 페스티벌에서 윤이상, 김순남, 이건우의 작품을 연주했을 때 청중들은 우리의 전통적 리듬과 정서로 쓰여진 가곡들의 낯선 매력에 큰 관심과 흥미, 호응을 보인 바 있지요. 이번에는  같은 시대 남쪽에서 같은 지향으로, ‘선토착화 후현대화’라는 신념으로 민속음악을 바탕으로 한 독창성을 표현하기 위해 이론 정립과 창작을 병행한 작곡가 나운영의 곡도 같이 연주합니다.   

리사이틀에서는 이외에도 작곡가 정회갑, 전인평, 이영조, 정태봉의 작품을 노래하는데, 저 개인적으로, 현대적인 음악어법에 우리의 것을 한껏 담아내어 한국 가곡의 정체성에 있어서 그 계보를 잇고 있다고 생각하는 작곡가들의 곡들을 뽑아본 것입니다. 머지않아 한국 가곡 음반을 내고픈 소망이 있는데, 그 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아주 뜻깊은 작업이 될 것으로 여깁니다. (통영국제음악제의 이번 리사이틀을 위해 특별히 클라리넷, 피아노, 소프라노 곡으로 편곡해 주신 이영조, 정태봉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Q. 페테르 외트뵈시가 지휘하는 '클랑포룸 빈' 공연에서 페테르 외트뵈시 '시크릿 키스'의 내레이션을 맡으실 예정입니다. 악보를 받으셨나요? 이 곡은 어떤 곡인가요?

A. 이번 음악제 덕분에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현대 작곡가 중 한 명인 외트뵈시 선생님과 작업하는 기회가 주어져 좋은 긴장으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악보도 보지 않고 작곡가 이름과 요염한 작품 이름에 매료되어 얼른 수락을 했는데, 엊그제 악보를 받고는 하기로 한 것이 잘한 일일까... 잠시 고민을 하긴 했습니다. ^^;; 하지만 이 작품이 탄생한 배경들을 공부하며 저로서는 큰 경험이 없는 현대음악에 대한 호기심과 특별히 ‘내레이터’로서의 이 작품 속 역할에 큰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작가 알렉산드로 바리코(Alessandro Baricco)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을 17분 음악에 담은 이 작품은 프랑스인 종쿠르(Joncour)가 실크의 재료가 되는 좋은 누에고치를 얻기 위해 일본에 간 것으로 시작합니다. 마침내 누에고치 상인을 만나 차를 대접받은 그는 그 상인의 무릎을 베고 말없이 누워있는 여자를 힐끗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해서 차를 들이키게 되는데, 이때 그녀가 말없이 그의 찻잔을 집어 들더니 정확히 그의 입술이 닿았던 곳에 입을 대고 차를 마신 것이죠. 이에 종쿠르 역시 그 찻잔을 들어 다시 그 자리에 입을 대고 잔을 비웁니다. 그야말로 아주 애틋하고 비밀스러운 입맞춤인 것이죠. 일본의 연극 ‘노’의 유일하다시피 한 여자 배우이자 현대음악과의 협업으로 이름이 난 료코 아오키의 의뢰로 작곡된 곡이라는데, 그 가사는 외트뵈시의 부인이 직접 골랐다고 하네요. 악보는 영어와 일본어로 되어있는데, 물론 지난해 초연은 모두 일본어입니다. 이번 음악제에서는 우리말로 초연이 되는데 가사가 궁금합니다! 유튜브에서 본 그녀의 연극 창법에 견주어 저는 한국말로 된 이 내레이션을 어떻게 생동감 있고 비밀스럽게 하게 될지 저도 그 공부가 기대됩니다. 친분 있는 현대 작곡가들에게 조언을 구하며 잘 준비해 봐야겠습니다.

Q. 안 해본 작품 가운데 해보고 싶은 것이 있나요?

A. 올해로 유럽 국제무대에 데뷔한 지 20년이 되는데, 안 해본 작품을 하는 것은 여전히 제 일상입니다. 올해 상반기만 해도 처음 무대에서 해보게 될 작품이 4편이나 되네요. 제가 주로 하는 고음악은 현대음악을 하는 것과 닮은 점이 있어서, 음반 등 레퍼런스가 많은 음악과는 달리 사람들 귀에 익은 잣대나 정석이 없고 그 해석이 자유롭지요. 그래서 공부하는 데에 시간이 좀 더 걸리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 실험적인 과정은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여전히 안 해본 곡이 많은데 그중에 그나마 알려진 곡을 말하라 하면 헨델의 ‹줄리오 체사레›를 꼽겠어요. 동양적인 매력을 가진 클레오파트라의 연기와 노래가 꼭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Q. 국내 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계획이 있나요?

A. 데뷔 2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와 투어를 가을에 계획하고 있습니다. 데뷔 당시 2년쯤 이러다 말겠지 했던 것이 20년이나 바쁘게 무대에 오를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맘으로 그동안 제 음악을 아껴주신 많은 분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는 마음으로, 여러 면에서 아주 특별한 음악회가 되도록 준비하고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

올해 일정 중 콘서트 작품을 극으로 만드는 흥미로운 작업을 두 작품 하게 되는데, 하나는 뉴욕에서 열리는 ‹모스틀리 모차르트 페스티벌›에서 모차르트 레퀴엠을 극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헨델이 유일하게 독일어로 남긴 작품인 ‹9개의 독일 아리아›를 Songs of Nature 라는 부제로 무대에 올리는 것입니다. 상하이, 베이징 뮤직 페스티벌, 홍콩, 뉴욕, 암스테르담 등 큰 투어를 계획하고 있어 작품이 더 견고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은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소프라노 임선혜 2017년 인터뷰

 제가 예전에 인터뷰했던 텍스트를 찾다가 이곳 블로그에 없어서 올려 둡니다. 통영국제음악재단 매거진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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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통영국제음악당 개관 전에 공연하셨던 것을 빼면, 지난 2015년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와 함께 '오르페오'를 주제로 공연한 이후로 이번이 두 번째 통영 공연입니다. 2015년 당시 통영국제음악당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A. 벌써 2년 전의 일이지만 저와 당시 함께 했던 베를린 고음악 아카데미 동료들에게도 아직 선명하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뛰어난 음향을 가진 아름다운 공연장과, 바다가 보이는 대기실은 정말 잊지 못한다며 지난주 함께 베를린 무직페스트에서 연주한 그 동료들이 다시 떠올리더군요. 아마 함부르크 엘프필하모니와 더불어 세상에서 제일 그림같이 멋진 대기실이라고요. 역시 저에게도 그렇답니다. 더불어 엄청나게 맛있게 먹은 음악당 내 이탈리안 레스토랑도 기억에 남네요.

Q. 거장 지휘자들과 함께 여러 음반을 녹음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시히스발트 카위컨 지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도 있는데요, 한 성부에 한 명으로 합창과 독창을 겸하게 한 편성이 독특합니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A. 이 녹음을 하기 몇 년 전 바흐의 ‹요한 수난곡›을 카위컨과 연주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적어도 한 성부에 두 명씩이었어요. 프로젝트 플랜에 합창단 언급이 없어서 이번에도 그런 방식일까 했는데, 첫 연습에 도착하니 정말 소프라노라고 나와 있는 부분은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야 한다는 말에 속된 말로 ‘멘붕’이 강림했죠. 다행히 그간 연주하며 들은 풍월 덕에 하루 만에 익혀서 차질은 없게 했지만 워낙 양이 많다 보니 노래를 해도 해도 끝이 안 나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아리아와 듀엣 몇 곡 부르던 때와 달리 정말 '예수 탄생 이야기’에 더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동료들과 가사를 맞추고, 또 바흐 특유의 수학 문제 풀이 같은 각 성부 진행을 함께 노래하며 엄청난 희열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한겨울 벨기에의 한 교회에서 녹음을 했는데, 공사 중이던 옆 건물의 소음 때문에 저녁에 시작해서 자정 넘어까지 손을 호호 불어가며 목도리를 온몸에 칭칭 감고 노래했던 기억도 이제 추억으로 남았네요.

Q. 바흐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처음 공연했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A. 그건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첫 공연은 아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즈음이었을까요? 오스트리아 빈에서 존 노이마이어의 연출, 안무로 함부르크 발레단과 한 공연이 기억에 아주 많이 남았어요. 베를린 도이체오퍼에서 오페라로 연출된 ‹마태오 수난곡› 프로덕션에 잠깐 참여했을 때와 비슷한 충격이 있었죠. 소설을 읽으며 내 머리로만 상상하던 것이 영화로 구체화되어 나왔을 때와 비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원래 연출되도록 만들어진 곡들이 아니고, 게다가 교회음악이기에 그 접근이 터부처럼 느껴졌던 것이 일반적 정서라, 뭔가 금지되었던 것의 안을 들여다보는 아찔함이 있었죠. 노이마이어의 발레에서 발레리노 예수가 나중에 십자가 지고 가는 장면들이 자유로의 춤으로 연출될 때 연주되는 바흐의 음악 역시 그를 따라 극장 전체를 일렁이며 춤추고 있었어요. 오페라를 넘은 종합예술의 어떤 완성점을 처음 맛보았다고 할까요? 십여 년 전에 비해 지금은 이런 시도들이 훨씬 많아졌어요. 미국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작년에 ‹요한 수난곡›을 스테이지 프로젝트로 만들기도 했고, 지난봄에는 하이든의 ‹천지창조›를 무대연출해서 엘프필하모니에 올린 작품에 참여하기도 했지요. 한계와 무한한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새로운 시도에 많은 연출가들이 호기심을 쏟고 있답니다. 

Q. 소프라노 성부를 맡은 솔리스트의 역할과 관련해 바흐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가 독특한 점이 있을까요? 바흐 칸타타와 비교했을 때, 바흐 수난곡과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이 다를지 가수로서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A. 가장 큰 차이는 주제에 따른 마음의 접근이겠지요? 한 곡은 수난을 노래하니 그 의미와 구원의 역사를, 다른 한 곡은 그 계획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니까요. 사실 바흐 오라토리오에서 솔리스트는 잘 차려진 음식 위에 올려지는 고명과 같은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극의 줄거리 설명은 복음사가(Evagelist)가 하고 극은 합창이 이끌어갑니다. 그 줄거리 설명과 드라마 사이사이에 솔리스트들은 격양된 희로애락의 감정을 읊지요. 이 부분들이 잘 읊어지고 진정성을 낳으면 관객들은 다음의 줄거리와 극들을 더 기대하며 공연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게 됩니다. 모든 바흐의 오라토리오들이 그런 역할을 솔리스트들에게 요구하고 제안하고 있지요. 다만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는 하루에 모든 곡이 연주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약간은 다른 성격이 있어요. 원래는 "크리스마스 기간” 각각 다른 날들에 연주하도록 작곡된 것이라 큰 줄거리는 우리가 아는 그 내용이지만, 6칸타타들을 하나로 만드는 큰 유기적인 결합은 덜합니다. 따라서 수난곡에서는 각 성부 아리아들의 위치와 배정을 어느 정도 계획했다면,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는 그런 큰 그림이 꼭 보이지는 않지요. 1번부터 6번까지를 하루 저녁에 연주하기도 하지만 어떤 공연들은 1, 4, 5, 6만 한다던가, 첫날은 1-3번, 두 번째 날은 3-6번 이렇게 정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에 따라 공연에서 부르는 아리아가 거의 없을 때도 있지요. 그날의 무대 위에서 정자세로 더 많이 앉아 있는 '감상의 날’이죠.

이 곡에서 또 주목할만 것은, 바흐가 자신이 세속칸타타에서 썼던 아리아들을 다시 사용했다는 것인데, 마침 그 세속 칸타타들을 연주해 본 경험이 있어서 제게도 흥미로웠던 부분입니다. 바흐가 자신이 이미 썼던 곡에 가사를 바꾸고 악기에 변화를 주어서 180도 전혀 다른 분위기가 나는 곡으로 둔갑시키는데 아주 큰 능력이 있는 작곡가임을 후대에 음악가들이 감탄해 마지않고 있습니다. 어린 헤라클레스에게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즐기라고 유혹하는 ‘쾌락’(Wohllust)의 소프라노 아리아 (BWV213)가 이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에서는 아기 예수에게 잘 자라는, 한없이 순수한 자장가로 등장하는데 이때는 알토의 아리아로 바뀝니다. 성부가 가사를 조금 바꿈으로써 '아주 관능적인 아리아'에서 '아주 순결한 아리아'로 바뀌는 마술이 일어난 거죠! 바흐는 알면 알수록 수수께끼 같은 매력이 드러나는 작곡가입니다. 바흐 사후 바흐를 세상에 다시 소개해 그의 작품들이 만개하게 한 멘델스존이 문득문득 참 고맙답니다.

Q. 뤼벡 합창 아카데미(Chorakademie Lübeck)는 2014년에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카르미나 부라나' 공연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던 합창단입니다. 뤼벡 합창 아카데미와 전에 협연하신 일이 있나요?

A. 소식은 많이 들었지만 함께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다만 지휘자 롤프 베크 선생님은 십여 년 전, 독일의 대표적 여름 페스티벌인 슐레스비히-홀스타인 페스티벌 디렉터로 계실 때 그 페스티벌 합창단과 함께 바흐의 ‹B단조 미사›를 함께 한 적이 있습니다. 워낙 독일에서 합창 음악에 대가로 알려지셨기에 그분이 가는 곳이면 합창이 늘 특별하고 좋았지요. 오랜만에 뵙게 될 텐데 다시 바흐 음악으로 함께하게 되어 기대됩니다. 

Q. 지난 2014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때, 페이스북으로 소프라노 황수미 • 박혜상 • 바리톤 유한승 씨를 극찬하면서 응원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 눈여겨보고 있는 신인 가수가 있나요?

A. 둘러볼 기회가 없어서 다 응원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실력 좋은 한국인 신인 가수들이 많습니다. 도밍코 콩쿠르에서 우승한 테너 김건욱도 그중 하나인데, 지난해에는 부산에서 ‹사랑의 묘약›을 같이 공연할 기회가 있었지요. 아름답고 진정성 가득한 음성과 음악을 대하는 겸손함 그리고 무대에서의 적극성이 앞으로 더 좋은 무대들을 열어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친분이 있는, 피츠버그 심포니 음악감독인 마에스트로 만프레드 호넥씨가 찾고 있는 테너 음성인 것 같아서 적극 추천을 했는데 잘 성사되어 서로 기뻐하는 모습에 저도 괜히 뿌듯했답니다. 

Q. 가수로서 느끼는 유럽 고음악계 및 오페라 극장의 최신 경향이나 판도를 국내 애호가 및 음악 전공 학생들에게 소개하자면?

A. 근 20년 전 저의 데뷔 초기에 유럽에서 솔리스트로 활동하는 가수들이 열 분도 채 안 되었다고 하면, 이제는 한국 출신 성악가들을 유럽의 어느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한국 출신 음악가들이 많은 국제 콩쿠르 입상으로 극장 무대에 진출한 덕이기도 하고 더 넓게는 유럽이 자신들의 음악시장을 점차 개방해서 모든 민족들과 나라의 사람들이 함께 경쟁하고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어느 나라 가수는, 음악가는 대략 이렇더라 하는 편견도 많이 사라지고 있고요. 그것은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새로운 세대의 젊은 음악가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테크닉뿐만 아니라 감성의 공감대를 이끌어낼 만큼 열려있고 문화 공부도 많이 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피부 색깔 등 많은 편견들과 선입견이 사라진 이상 아티스트, 연주자 개개인의 남다른 개성, 그리고 그 개성의 뚜렷함이 호감을 얻게 되면 많은 주목을 얻게 되는 것이죠. 동양인이 수석으로 앉아 있어도 이상하지 않고 동양인이 음악사 최초 서양 오페라에서 주인공이어도 거부감이 없는, 오히려 어떤 다른 색깔을 내어줄까 하는 기대를 사게 만들 수도 있는 시대. 더 이상 동양인이라 절대 안 된다는 말은 듣지 않아도 되는 '열린 세상'에서 자신의 음악을 맘껏 펼쳐볼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 같습니다. 최첨단 테크놀로지로 지구의 많은 나라들이 서로 가깝게 느껴지는 덕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오랫동안 열정과 인내로 국제무대를 지켜내시고 좋은 이미지들을 남겨주신 여러 음악가 선배님들의 노고를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Q. 자신만의 발성법을 찾기 전에 흉내 내려 했던 가수가 있었나요? 자신의 목소리를 찾게 된 과정이나 계기가 궁금합니다. 더 나은 발성법을 고민 중인 성악도들에게 조언 한마디 부탁합니다.

A. 미렐라 프레니를 좋아하던 시절, 성악에 입문하고 대학 입시를 치를 때까지는 아주 고음은 잘 안 나지만 제법 굵고 큰 소리가 나는 소프라노였습니다. 상상이 어려우실 수도 있겠지만요.(웃음) 제게 지금의 목소리를 갖도록 길을 닦아주신 분이 서울대 박노경 교수님이셨어요. 자기 몸에 어울리는 소리를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국제 무대에 서기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가볍고 날씬해서 고음이 잘 나는 음성이 실제 이 아이의 몸에 맞지 않을까 하고 많이 연구하셨다고 해요. 저는 그 깊은 뜻은 감히 헤아리지 못했고 그저 선생님의 음악성에 늘 감탄하던지라 선생님을 무척 따랐지요. 그래서 2-3학년 때는 하이 C가 겨우 나던 것이 4학년 때는 콩쿠르에서 E♭이 나는 ‹청교도› 의 아리아나, 루치아의 ‹광란의 아리아›들로 1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 데뷔 후 주로 고음악이 주 레퍼토리가 된 통에 벨칸토 레퍼토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줄었지만, 바흐,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가수로, 또 각 장르에 유연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때 선생님께서 제 몸에 무리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소리를 찾아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소리와 노래를 가장 오랫동안 들으셔서 가장 잘 아시는 분이기에 지금도 한국에 가면 레슨을 받고 조언을 구합니다.

또 성악가들은 노래하면서 자신의 소리를 듣기가 힘들기에 연습이든 공연이든 되도록 녹음을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요. 자기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때로 민망하고 쥐구멍으로 숨고 싶게 할 때도 있지만, 내 목소리를 객관적으로 들으며 지향점과 지양점을 스스로 깨닫고 생각하는 꼭 지나야 하는 깜깜한 터널 같은 작업이지요. 덕분에 많은 음악적 아이디어가 생기기도 하고요. 때로는 다른 성악가들의 노래를 들으며 참고할 때도 있는데, 때마다 다르지요. 지금 당장 어떤 부분이 부족하거나 넘친다는 생각이 들면 레퍼런스가 될 수 있는 소프라노들을 듣기도 합니다. 캐슬린 배틀이 될 때도 있고, 엘리 아멜링이나 알린 오거(Arleen Auger) 가 될 때도. 최근에는 마리아 바요의 이태리 레치타티보 리듬에 반해서 많이 참고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 성악도들이 유학을 가면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어린 나이에 무겁게 노래하지 말라는 이야기일 겁니다. 오래 건강하게 그리고 듣기 좋게 노래하기 위한 기본이 되기 때문일 테지요. 내가 잘되길 진심으로 바라는 선생님의 좋은 귀가 한 성악가의 커리어를 함께 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에 대해 많은 노력과 투자를 해봐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Q. 국내 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계획이 있나요?

A. 몇몇 새 음반이 곧 출반됩니다. 파비오 비온디가 이끄는 “에우로파 갈란테”와 빈 공연 실황 녹음을 한 헨델의 오페라 ‹실라›, 그리고 B-Five라는 리코더(Blockfloete) 그룹과 지난해 녹음한 윌리엄 버드(William Byrd)의 Songs. 

요절한 유대인 작곡가 에르빈 슐호프(Erwin Schulhoff) 의 가곡 전집을 남독일방송국과 함께 녹음 중인데, 가곡 작곡가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작곡가의 다양한 면모를 세계초연 레코딩으로 소개할 수 있어 기쁩니다. 

올해 모차르트 오페라 ‹여자는 다 그래›로 내한해서 세미 스테이지 버전 모차르트 오페라의 진수를 보였던 르네 야콥스와 ‘프라이부르크 바로크오케스트라’가 다시 내년에는 ‘피가로의 결혼’으로 내한합니다. 영악하고 요염한 하녀에서 사랑스럽고 재치 있는 새신부, 수잔나로 함께 공연하게 되어 벌써부터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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