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7일 금요일

정화된 밤, 변용된 밤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선율과 선율을 나란히 이어가며 관계를 맺고 조화를 이루는 것, 다시 말해 ’대위법’이 바로크 음악의 핵심이라면, 화음과 화음이 서로의 근거가 되면서 ’논리’를 세우고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끔 하는 것, 다시 말해 ’화성법’이 고전주의 음악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바로크 음악이 순환적이라면, 고전주의 음악은 선적(linear)이고 논리적이며 목표지향적입니다.

고전주의 시대 이후로 서양음악은 더 복잡한 논리, 긴장과 이완 사이를 오가는 더 복잡한 구조, 그러니까 ’협화음’으로 긴장을 해결하기에 앞서 더 많은 ’불협화음’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변해 갔습니다. ’더 많은 불협화음’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협화음이 아예 사라져 버리는 이른바 ’무조음악’이 되지요. 음악학자 크리스티안 카덴은 그런 점에서 무조음악의 등장을 “역사의 완성”이라고까지 했습니다.

무조음악이라는 ‘특이점’까지 가기에 앞서, 조성음악의 틀 안에서 불협화음을 최대치로 담아냄으로써 당시 음악계에 충격을 주었던 작곡가는 리하르트 바그너입니다. ’트리스탄 화음’이라는 음악적 장치가 그 핵심이었지요. 그리고 무조음악을 ’발명’한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처음에 바그너의 화성과 브람스의 형식논리를 결합함으로써 자신의 초기 음악 양식을 정립했습니다. ’정화된 밤’, ‘구레의 노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걸작입니다.

쇤베르크는 리하르트 데멜(Richard Dehmel)의 시 ‘두 사람’(Zwei Menschen)에서 영감을 받아 ‘정화된 밤’을 작곡했다고 합니다. ’정화된 밤’의 독일어 원어 제목은 ’Verklärte Nacht’(페르클레르테 나흐트)입니다. ‘페르클레르테’의 동사 원형인 ’verklären’(페르클레렌)은 변용(變容) 시키다, 신성하게 하다, 밝게 하다 등을 뜻합니다. 말뿌리를 좀 더 따지면, 상태 변화를 뜻하는 접두사 ‘ver-’와 ’깨끗하다, 맑다, 밝다, 명확하다’ 등을 뜻하는 ’klären’이 결합한 낱말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탄생한 19세기 말에는 기독교, 연금술, 신비주의 등에서 말하는 ‘변용’(Verklärung; 페르클레룽)이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서 중요한 화두였던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두 사람은 각자의 에고를 초월하여 통합된 자아로 ’변용’됩니다. 그리고 오페라는 이런 지시문으로 끝나지요. “이졸데는 변용된(verklärt) 듯 브랑게네 품에서 트리스탄 몸 위로 부드럽게 쓰러진다. […] 막이 천천히 내린다.”

이제 ’페르클레르테 나흐트’의 원작 시 ’두 사람’을 읽어 보세요:

두 사람이 황량하고 스산한 숲을 거닐고 있다.
달이 그들을 따라가고, 그들은 달을 쳐다본다.
달은 떡갈나무 위로 높이 나아가고
하늘에는 빛을 가릴 구름 한 점 없이
검고 뾰족한 나뭇가지가 달을 찌른다.
여자의 목소리 들린다:

“나는 아이를 가졌어요. 그대 아이가 아니랍니다.
나는 죄를 짓고 그대 곁을 걸어요.
나는 나에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어요.
나는 행복을 바랄 수 없어요.
그래도 나는 갈망했어요
삶의 풍요로움과, 어머니의 기쁨과,
어머니의 의무를요. 그래서 죄를 지었어요,
그래서 떨리는 내 몸을
낯선 사내의 품에 맡기고
복 받았다고 여기기도 했어요.
이제 인생이 복수를 하네요,
내가 그대를, 그대를, 만났네요.”

그녀는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그녀는 고개를 든다. 달이 따라온다.
그녀의 어두운 시선이 빛에 잠긴다.
남자의 목소리 들린다:

“그대가 잉태한 아이를
영혼의 짐으로 삼지 말아요.
보세요, 우주가 얼마나 밝게 빛나는지!
광채가 모든 곳에 쏟아져요,
그대와 내가 차가운 바다를 항해해도
우리 안에서 따사로운 빛이 타올라요
그대에게서 나에게로,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그 열기가 낯선 이의 아이를 정화하고
그대가 잉태한 내 아이가 되리니
그대가 나에게 광채를 비추고,
그대가 내게서 아이를 만들었네요.”

남자는 여자의 굴곡진 허리를 감싸 안는다.
그들의 숨결이 공기 속에서 입 맞춘다.
두 사람이 높고 밝은 밤 속을 걸어간다.

“그 열기가 낯선 이의 아이를 정화하고”라고 번역한 대목에서 ‘정화하고’의 독일어 원어가 바로 ’페르클레렌’(verklären)입니다. ’정화’라는 표현의 바탕에는 혼외 자식이 ’더러운 것’이라는 인식이 있는 듯해서 불편합니다. 모든 생명은 귀한 것이 아니던가요. 그런데 ’페르클레렌’을 ’변용’으로 이해하면 뜻이 또 달라집니다. 그리고 ’페르클레렌’이 시어로 나오기 전후의 시 내용이 중의적이고, 탐미적이고, 야하지요. 제가 번역하면서 그 뉘앙스를 되도록 살리고 너무 민망한 표현은 순화했습니다.

2월 8일 토요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 에벤 콰르텟의 마티외 에르조그 등이 참여하는 음악 교육 프로그램 ‘앙코르 체임버 뮤직’의 강사진들의 공연에서 쇤베르크의 ’페르클레르테 나흐트’가 연주됩니다. 그리고 4월 4일에는 통영국제음악제 공식 공연으로 세종솔로이스츠가 윤이상의 ’영상’ 등과 더불어 쇤베르크의 ’페르클레르테 나흐트’를 연주합니다. 원작 시의 탐미적인 느낌이 음악으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한 번 들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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