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1일 금요일

사이렌의 침묵, 그리고 어느 사무실의 어수선한 풍경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을 유혹해서 바다에 뛰어들게끔 한다는 요정 세이렌에 관해 다들 아실 겁니다. 호메로스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오디세우스가 꾀를 내어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낸다는 이야기나, 영어식 표기인 '사이렌'이 '경보'를 뜻하게 되었다는 얘기도 많이들 아실 듯해요.

윤이상 이후 국제 사회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한국 작곡가인 진은숙 선생은 《사이렌의 침묵》(Le Silence des Sirènes)이라는 제목으로 곡을 썼습니다. 2014년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세계초연됐고, 이번 통영국제음악제 폐막공연에서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지휘하는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가 아시아초연 예정이지요.

'사이렌의 침묵'이라는 제목은 카프카가 쓴 수필에서 따온 것이라 합니다. 세이렌의 노래보다 침묵이 사실은 더 무서운 무기라는 카프카의 역설적인 말이 작곡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독일어 수필 제목이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세이렌'이 아닌 '사이렌'이 되었는데, 진은숙 작품이 세계초연된 소식이 한국에 보도되면서 그 제목이 널리 알려졌지요.

진은숙 작곡가는 이야기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오디세이아』와 제임스 조이스 소설 『율리시스』에 나오는 세이렌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이 곡을 썼습니다. 악보를 보면 『율리시스』가 핵심이고 『오디세이아』가 앞뒤를 액자처럼 감싸는 짜임새예요. 무엇보다 『율리시스』 에피소드 11 앞부분에 나오는 시(?)를 주요 노랫말로 쓰고 있지요.

유혹. 부드러운 말. 하지만 보라! 빛나는 별빛은 흐려져 간다. 오, 장미여! 지저귀면서 대답하는 멜로디. 캐스틸. 아침은 온다.
짤랑, 짤랑, 이륜마차가 경쾌하게 짤랑, 짤랑.
동전이 땡그랑, 시계가 땡.
[…] 맙소사, 그는 전혀―듣고 있지 않―았어.

동서문화사에서 출판한 『율리시스』 번역본(김성숙 옮김)에서 조금 인용해 봤습니다. 작가는 '세이렌'이라는 키워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음악적으로 흥미로운 말장난으로 에피소드 11 앞부분을 시작했다지요. 덕분에 영어 원문이나 우리말 번역본이나 참 난해하게 느껴지지만, 의미를 이해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나면 본질이 '들리기' 시작할 겁니다.

『율리시스』에서 작가는 에피소드마다 『오디세이아』를 패러디하거나 모티브를 따와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에피소드 11에 나오는 세이렌은 술집 아가씨 '미스 케네디'와 '미스 다우스'입니다. 에피소드 11에서 오디세우스에 해당하는 '레오폴드 블룸'이 호텔 바에서 연애편지를 쓰다가 두 아가씨가 잡담하는 내용에 자꾸만 주의를 빼앗기지요.

뭔가에 집중하려는데 자꾸만 주의를 뺏기는 경험은 누구나 해봤을 겁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요즘 통영국제음악제 때문에 바쁨이 폭발하고 있어요. 사무실에서는 긴박하거나 골치 아픈 상황이 수시로 일어나고, 그것을 수습하느라 곧잘 왁자지껄해집니다. 그 와중에 각자 급한 일을 처리하려면 집중해야 하는데, 협업을 하려면 또 마냥 귀를 닫고 있을 수만도 없어요. 『율리시스』 에피소드 11이 어찌나 마음에 와 닿는지요!

이제, 제임스 조이스가 쓴 저 시(?)를 다시 읽어 보세요. 작곡가는 바로 이 느낌을 진은숙 스타일로 기막히게 살려 음악에 담았습니다. 작곡가는 소프라노 바바라 해니건을 위해 이 곡을 썼고 바바라 해니건이 세계초연을 맡았는데요, 현대음악계에서 명성이 그 못지않은 세계 정상급 소프라노 마리솔 몬탈보가 들려주는 세이렌은 어떨지 기대됩니다.

마지막으로 『율리시스』 에피소드 11의 시(?) 마지막 대목을 인용할게요.

암갈색 머리를 가까이에서 어디로? 금발은 멀리에서 어디로? 말발굽은 어디로?
르르프르. 크라. 크란들.
그때 바로 그때까지는. 나의 비명(碑銘). 작성되어 있길.
끝.
시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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