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3일 월요일

올해의 라이벌 연주자: 멍포 리 vs. 엘라 판 파우커

한산신문에 연재 중인 칼럼입니다.


리멍포(李孟坡)는 대만 출신 에스파냐 사람입니다. 제1 국적이 에스파냐라서 서양식으로 '멍포 리'(Mon-Puo Lee)라 공식 표기했고, 한글 표기는 국립국어원에서 고시한 표준외래어표기법 용례를 따랐지만, 우리끼리는 문포, 만포 등 한국적인 발음으로 부르곤 했지요. 한자 이름을 한국식으로 읽으면 '이맹파'가 되겠네요. '가파른 언덕'이라는 뜻이고, 중국식으로 성조를 보태서 읽으면 '멍↘포―'가 되는 듯합니다. 베를린 예술대학 학생으로, 저 유명한 옌스 페터 마인츠를 사사하고 있습니다.

엘라 판 파우커(Ella van Poucke)는 네덜란드 사람입니다. 그런데 생김새를 보면 이 아가씨야말로 에스파냐 쪽 사람 같아요. 독일 크론베르크 아카데미 대학원생이고, 프란스 헬메르손을 사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보니 프랑크푸르트 HR방송교향악단, 피아니스트 언드라시 시프, 비올리스트 노부코 이마이 등과 협연한 일이 있을 만큼 이미 경력이 화려하네요.

이 두 사람이 2015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리멍포가 본선 경연 내내 화제가 되며 우승 후보로 꼽히곤 했고, 엘라 판 파우커는 결승까지 오른 일이 뜻밖이라는 의견이 더러 있을 만큼 실력 차이가 확실해 보였습니다. 저는 2차 본선 때 엘라 판 파우커의 프로코피예프 첼로 소나타를 듣고 절대로 결선에는 못 갈 거라고 예상했다가 결과를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지요.

엘라 판 파우커의 본선 경연을 들으면서, 저는 사춘기 소녀 감성이 연주에 묻어난다고 느꼈습니다. 풋풋하다기보다는 유치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결선 전날 슈만 협주곡 리허설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엘라의 연주는, 말하자면 '슈만스러운' 연주였습니다. 슈만은 제 취향에 안 맞는 편이라 그것이 편견이 되지 않았나 싶더라고요. 심사위원들은 제가 보지 못한 장점을 훤히 꿰뚫어 봤었나 봅니다.

사춘기에 할 법한 망상과 유치한 행동을 일컫는 속어로 '중2병'이라는 말이 있지요. 엘라의 연주를 들으면서 제가 떠올린 말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중2병'이 차라리 시대정신이었다고 할 만한 때가 낭만주의 시대라 할 수 있겠고, 슈만은 그런 시대정신과 누구보다 가까웠던 작곡가일 겁니다. 그래서인지 슈만 첼로 협주곡은 엘라와 너무나 잘 어울리더군요.

천운이 따랐던 엘라 판 파우커와 달리, 리멍포는 운이 없었습니다. 본선 2차 경연 중 첼로 활이 부러져서 연주를 중단했다가 손에 익지 않은 활을 가져와 연주를 이어가는 사고도 있었고, 다음날 급히 활을 수리해 와 결선 때 사용했다더군요. 그러나 가장 큰 불행은 결선에서 첫 번째 순서가 된 일이었습니다.

지난해 콩쿠르 때 우승 후보로 손꼽히던 흐라챠 아바네시안이 첫 번째 순서로 무대에 나와 실수를 연발하면서 끝내 입상에 실패한 사건을 기억하시는 분 제법 있을 겁니다. 콩쿠르에서는 뒷 차례일수록 유리하고, 첫 번째가 되면 심리적 압박감이 엄청나다고 하지요. 리멍포가 결선 무대에서 벌벌 떠는 모습을 많이들 보셨을 겁니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는 첫 공식 행사로 참가자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경연 순서를 추첨합니다. 결선 때에는 심사위원 판단에 따라 순서를 새로 정하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순서를 바꾸지 않기로 결정했다네요. 그래서 리멍포는 결국 2등이 되었지만, 그만하면 잘했다고도 할 수 있을 듯해요.

리멍포가 첫 번째 순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마지막 순서인 김정환이 우승할 가능성을 점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두 사람 얘기만 했는데, 사실 김정환 씨도 만만치 않은 우승 후보였지요. 결선 전날 리허설을 지켜본 저는 김정환 씨를 포함해 결선 진출자 세 명 모두 일등을 할 수 있고, 가장 큰 변수는 리멍포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선 때 김정환 씨가 연주한 곡은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 1번이었지요. 저는 사실 이 곡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는데, 곡이 얼마나 멋지던지요! 결선 연주를 듣고서 저는 이 사람이 일등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결정적인 '한 방'이 모자란 점이 걸리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3등이 될 줄은 참말 몰랐지요! 그리고 설마 하던 엘라가 1등을 차지했습니다.

심사위원장 라이문트 트렝클러 선생은 결과 발표에 앞서 콩쿠르를 '경쟁'이 아닌 '성장'을 위한 계기로 삼는 일이 중요하다는 요지로 명연설을 했지요. 제 예상을 여러 차례 벗어난 이번 콩쿠르를 지켜보면서 저도 한 수 배운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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