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2일 월요일

열린 텍스트와 열린 해석, 역사주의 연주에 관하여

『한산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통영에서 열독률이 매우 높은 매체라고 하네요.

원문 링크: http://www.hansa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2875

베토벤 교향곡 9번 d단조 '합창.' 폭풍처럼 몰아치는 1악장과 광란의 스케르초 악장, 그리고 애달픈 아다지오 악장을 지나 마지막 악장에 들어서면, 이른바 '공포의 팡파르'가 마치 지옥문이 열린 듯이 터져 나옵니다.

이 대목은 사실 악보대로라면 주선율을 목관악기가 연주하고 트럼펫 등은 단순한 음형으로 뒤를 받쳐 주는 역할을 할 뿐이에요. 그런데 이 곡이 초연될 당시에 쓰이던 트럼펫으로는 낼 수 없던 음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오늘날에는 트럼펫에 주선율을 맡기는 것이 진정한 베토벤의 의도라고 '해석'할 수 있지요. 이왕이면 트럼펫의 강력한 음량에 맞게 악기 편성을 악보 지시보다 '뻥튀기'해 주고요.

몇십 년 전부터 좀 다른 해석이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악보에 있는 음표 그대로, 악보에 있는 편성 그대로 연주하자고요. 더 나아가 작품이 발표될 당시 악기로 연주하고 악기 조율법까지 그때 관습대로 하며, 악보에 나오는 작은 나타냄말까지 당시 관습과 작곡가의 버릇 등을 고려해 '해석'하고자 하면 본격적인 학술 연구가 됩니다.

이런 해석은 초기에 '원전 연주' 또는 '정격 연주'라 불리면서 많은 논란을 불러왔습니다. 무엇보다 낯선 악기와 낯선 조율법 등에서 오는 낯선 음향 때문에 격렬한 저항이 일어나곤 했지요. 음악학자 로렌스 드레이퍼스는 이러한 강한 반감을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에 대한 동시대 사람들의 반감과 견주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원전'(原典) 또는 '정격'(正格; authentic)이라는 말에 기존 주류 연주 방식이 틀렸음을 암시하는 독선적인 뜻이 있음을 경계해 '역사주의 연주' 또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연주(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라는 가치중립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시대악기(period instruments) 또는 역사적 악기(historical instruments)라는 용어도 있어요. 작품이 쓰일 당시 악기를 일컫는 말이지요.

그리고 음악학자들이 내놓은 객관적인 증거 앞에서 역사주의 연주는 조금씩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에는 심지어 하이팅크나 정명훈 같은 전통적인 거장 지휘자들도 역사주의를 일부 수용할 정도이지요. 이를테면 정명훈이 지휘한 서울시향 연주회에서, 이 글 첫머리에 말씀드린 바로 그 대목을 사람들이 낯설어하면서 연주자들이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더군요. 정명훈 지휘자는 베토벤 교향곡을 연주할 때 다른 많은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기존 관습과 달리 악보 그대로 연주한 바 있습니다.

작곡가의 의도를 가장 잘 살린 연주가 가장 훌륭한 연주라는 명제가 참이라면, 작곡가의 진정한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작곡가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 않는 다음에야 알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작품이 이미 발표된 이상 작곡가의 의도가 절대적이라 하기도 어렵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작품을 내놓고 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라고도 했지요. 작품이라는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고, 그 해석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지휘자 로저 노링턴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가 지휘자로서 모차르트를 공부한 게 60년이거든요. 구석구석을 다 공부했어요. 처음에는 모차르트의 음악 언어를 신성한 것처럼 대했는데, 지난 세기에 다들 이런 식으로 오류를 범했지요. 그러니까 무슨 교회음악처럼 엄숙하고 고풍스러운 소리가 났단 말이에요. 카라얀을 생각해 보라고요. '음악이 즐겁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가 요즘 제 좌우명이에요. 모차르트도 아버지한테 이 말을 듣고 곡을 복잡하게 쓰지 않도록 주의했다고 하지요. 궁정에서는 향락이 먼저였거든요."

오는 10월 1일, 역사주의 연주를 대표하는 우리 시대의 거장 지휘자 로저 노링턴이 취리히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통영국제음악당을 찾습니다. 역사주의 연주에 익숙지 않은 사람은 이들의 연주를 듣고 낯설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학술적 연구 성과를 어디까지 수용하고 작품 해석에 반영하느냐 하는 문제에 정답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열린 텍스트와 열린 마음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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