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2일 토요일

안토니 비트, 서울시향, 바그너 《로엔그린》 1막 전주곡

연주회 있는 날에는 웬만하면 휴가를 냅니다. 그런데 어제는 직장 일정이 메롱이라 휴가를 못 냈어요. 늦지 않게 퇴근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데다가, 온종일 일 때문에 시달리느라 너무 피곤해서, 그냥 포기하고 집에서 쉬어야겠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예술의전당까지 부랴부랴 달려간 까닭은 안토니 비트가 이끌어내는 음악을 현장에서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주회 시작할 때쯤에 갑자기 생각했습니다. 오늘 프로그램이 뭐였더라?

첫 화음이 들려올 때 '아!' 했습니다. 바그너 《로엔그린》 1막 전주곡.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와 달리 현악기만 16성부쯤 될 만큼 몹시 복잡한 곡입니다. (정확히 몇 성부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악보 확인하기는 귀찮아요. ^^) 그래서 저는 이 곡을 실연으로 제대로 연주하는 꼴을 본 일이 없어요. 웅성웅성하다가 갑자기 우르릉 쾅! 하고는 다시 웅성웅성하다 말고 흐지부지 끝나기 일쑤죠. 연주회 첫 곡으로 '대충 때우는 곡'쯤으로 취급받으니 연습을 많이 하지도 않겠죠.

그런데 이날 연주를 들으면서 전율이 일었습니다. 성부 하나하나가 마치 햇빛을 받아 일렁이는 물결처럼 반짝반짝합니다. 클라이맥스를 지나서도 곧바로 김이 빠져버리지 않고, 어찌 들으면 처연한 화음을 집요하게 살려냅니다. 흠잡을 곳을 찾자면 제법 있었지만, 실연으로 이만큼 연주했으면 다 용서됩니다. 그런데 뒤이어서 3막 전주곡이 나오니 오히려 좋은 분위기가 깨지더군요. 3막 전주곡도 잘하기는 했지만, 1막 전주곡에서 여운을 남기며 끝나 줘야 할 것 같았습니다.

《베젠동크 가곡》을 협연한 예카테리나 구바노바는 지난번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브랑게네 역을 맡았던 사람이죠. 대단한 실력을 그때 충분히 확인했으니 어제는 딱 기대한 만큼 듣고 왔습니다. 러시아 사람인데 독일어 딕션이 참 좋아요. 그래서 제 엉터리 독일어 실력으로도 원어 가사를 제법 곱씹게 되었는데, 《트리스탄과 이졸데》에도 나오는 중요한 단어들이 음악과 함께 머릿속에서 조각 맞추기가 되면서, 특히 제2곡 〈Stehe still!〉(멈추어라)가 제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야한 곡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er)trinken, versinken, erkennt, 뭐 이런 단어들이 맥락을 알고 보면 참 야한 말들이죠.

안토니 비트, 우리나라에도 제법 널리 알려졌지만, 그래도 명성이 실력에 한참 못 미치는 지휘자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분이 동유럽 출신이라서 차별받는 게 아닌지 의심합니다. 실력만 보면 베를린필 음악감독으로 가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날 연주는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베젠동크 가곡》에서나 《영웅의 생애》에서나 서울시향의 기본 실력 이상을 끌어내지는 못하는 느낌. 서울시향이 연습을 많이 못 했다고 하던데 그 때문인지, 아니면 안토니 비트 실력이 결국 그만큼이었는지는 좀 두고 봐야겠습니다.

글 찾기

글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