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1일 월요일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 ― 리게티 《아트모스페르》


☞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 ― 들어가며
☞ 오디오쟁이에게 뽐뿌질하는 현대음악 ― 베베른 Op.10



음색(音色)이란 무엇인가? 영어로는 'timbre'라 하고 독일어로는 'Klangfarbe'라 부르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소리의 색깔'처럼 말만 바꾼 수준을 벗어난 뜻풀이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 음을 만드는 구성 요소의 차이로 생기는, 소리의 감각적 특색. 소리의 높낮이, 크기가 같더라도 진동체나 발음체, 진동 방법에 따라 음이 갖는 감각적 성질에는 차이가 생긴다. ≒소리맵시ㆍ음빛깔. (표준국어대사전)

- 악기 소리나 목소리가 발성이나 악기에 따라 (음높이 및 세기와 달리) 띄는 특징으로... (옥스포드 영어사전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 세기(loudness)와 높이(pitch)가 같은 두 소리를 듣는이가 다르다고 느끼게끔 하는 감각 속성 (미국표준협회 ANSI, 1960)

- 음높이, 음량, 음길이와는 다른 기준을 사용하여 두 소리가 다르다고 판단하게끔 하는 청감각 속성 (Pratt & Doak, 1976)

서로 다른 뜻풀이에 한 가지 닮은 곳이 있다. '음색은 무엇이다'가 아니라 '음색은 무엇 무엇이 아니다'라며 이른바 부정적 정의(negative definition)를 내린 대목이다. 음색을 결정하는 요인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음색은 배음(harmonics) 스펙트럼, 포만트(formant), 위상(phase), 엔벨로프(envelope), 비브라토 주기 및 진폭 등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 글은 음향학 개론이 아니므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 다만, 소리를 이루는 모든 것이 음색과 엮여 있으며 위에서 음색과 구분한 음높이, 음량, 음길이 또한 음색을 결정하는 요인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자.

20세기 들어 서양음악에서 음색이 선율과 리듬과 화성 못지않게 중요해졌다는 얘기는 이미 한 바 있다. 그런데 1950년대 말부터는 음색을 뺀 나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음악마저 나타났다. 앞글에서 짧게 소개한 총열주의 음악에서 '음' 하나하나가 중요한 역할을 하며 논리와 질서를 이루었다면, 그 반발로 나타난 이른바 음향음악(Klangkomposition)에서는 음들이 모여 이룬 '음향층' 또는 '덩어리 Cluster'가 음악이 된다. 선율과 리듬은 조각조각 나뉘어 카오스 속에서 녹아버리고, 화음은 음 덩어리가 되어 '음'과 '소음' 사이를 넘나든다. 이를테면 피아노 건반을 주먹이나 팔꿈치로 '쿵' 내려쳤을 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된 '덩어리'가 음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리게티(Ligeti György Sándor, 1923-2006, 헝가리계 루마니아 사람으로 성을 앞에 쓴다)는 총열주의 음악을 비판하며 들리지 않는 '구조'가 아니라 들리는 '형상'을 음악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1년 작품 《아트모스페르》(Atmosphères)를 들어보자. 이 작품의 '구조'는 귀로 듣고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악보를 들여다보아도 음표의 카오스 속에서 정신을 잃기 쉽다. 그러나 예쁜 여자를 알아보는데 피부세포를 분석할 필요는 없는 법. 굳이 악보를 분석할 사람은 먼저 돋보기를 준비한 다음 음표가 아무리 많아도 '떡실신'하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 그리고 나서 악보를 본다면 작곡가의 위대한 '노동'에 존경을 바치게 되리라.
《아트모스페르》 마디 88-92. © Universal Edition

그러면 이 곡의 '형상'은 무엇인가? 소리 또는 '음향'이 덩어리를 이루어 흘러가는 게 느껴지는가? 이 덩어리는 멈춰 있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며, 자라거나 줄어들고 뭉치거나 흩어지기도 한다. 이 곡은 스탠리 큐브릭이 감독한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처음과 마지막에 쓰이기도 했는데(마지막 장면에서는 리게티의 다른 작품과 함께 편집), 소리로 된 '형상'이 화면과 어떻게 어우러지는지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여기서 잠깐! 큐브릭은 리게티 허락 없이 멋대로 이 음악을 썼으며, 리게티는 6년 동안 법정싸움을 한 끝에 고작 3,500달러만을 보상금으로 받았다고 한다. 거대자본의 횡포를 잠시 규탄해 주자.)

그런가 하면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소리가 흘러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움직인다'라고 할 수 있는가? 전체적으로 보면 이 음악은 멈춰 있지 않은가? 맞다.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이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 곡은 멈춰 있는 듯 느껴진다. 리게티는 이를 두고 "얼어붙은 시간"이라 했으며, 이것은 리게티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판타지이자 초기 작품을 대표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다만, 이른바 클러스터(덩어리) 기법을 쓴 작품이 모두 그렇지는 않으며 작곡가에 따라 또 작곡 시기에 따라 모두 느낌이 다르다. 그러나 같은 해 발표된 펜데레츠키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는 어찌 들으면 《아트모스페르》와 제법 닮았다.
'노동'을 줄이려고 꾀를 낸 펜데레츠키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 마디 18.
© Schott Music

'아트모스페르'는 대기(大氣)를 뜻하기도 하고 '분위기'를 뜻하기도 한다. 이 곡 제목은 두 가지 뜻 모두를 아우른다 하겠는데, 음반을 들어보면 둘 가운데 어느 쪽에 무게를 싣느냐에 따라, 또 '숲'과 '나뭇잎 위 하루살이'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살리느냐에 따라 해석이 조금씩 달라지는 듯하다. 당신이 오디오쟁이라면 '형상'이 차지하는 3차원 공간이 때때로 바뀌는 모습을 살펴보는 재미 또한 놓치지 마시라.

《아트모스페르》는 오디오쟁이에게 특별한 쓰임새가 있다. 당신이 오디오쟁이라면 이 곡을 듣고 바로 느낌이 와야 한다. 오디오를 길들일 때 쓰는 이른바 '오디오 에이징 음악'과 비슷하지 않은가! 당신이 'XLO Burn-in CD'를 구하지 못했다면 《아트모스페르》로 오디오를 길들여 보면 어떨까? 자꾸 듣다 보면 좋아질지도 모른다! 오디오를 길들이는 당신을 가족이 한심해한다면 현대음악이라며 으스댈 수도 있겠다. '에헴! 들어나 봤나 리게티?'

오디오 길들이기가 목적이라면 《아트모스페르》 말고도 좋은 현대음악이 많다. '전자음악'으로 분류되는 음악 대부분이 오디오의 한계를 박박 긁어댄다. 파이프 오르간 음악 또한 마찬가지인데, 따지고 보면 '클러스터 기법'의 유래를 바로크 시대 오르간 음악에서 찾을 수도 있다. 이왕이면 오르간 음악 또한 바흐보다는 메시앙이나 뒤뤼플레(Duruflé)같은 현대 작곡가를 들어보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겠다.

다음 시간에는 클러스터 기법을 '한국적으로' 활용한 윤이상 음악을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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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철. 2009.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선스:영리·개작불허'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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